오늘의 저편 <187>
오늘의 저편 <187>
  • 경남일보
  • 승인 2012.09.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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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식은 인민군에게 발각되었다가 곤욕을 치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쏟아냈다. 인민군 앞잡이들은 빨갱이보다 훨씬 더 독하다는 말도 늘어놓았다.

 여주댁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용진이만 진석이 옆에 데려가지 않으면 되잖아요?”

 동생도 한 번 볼 겸 학동에 가고 싶었던 동숙은 목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결국 어머니와 함께 서울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형식은 혼자 서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온몸이 기운이 한꺼번에 다 빠져버린 듯 멍한 표정이었다. 보다 못한 동숙이가 잠시라도 쉬었다가 길을 떠나라고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는 약간의 웃음을 입가에 그리며 그냥 발을 떼어놓았다. 어서 빨리 용진이의 소식을 민숙에게 전해주어야 한다는 생각만이 그의 머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이었다.

 태반을 구하기 위해 이 궁리 저 궁리 하면서 머릿속이 바쁘던 화성댁은 부리나케 선반 위에 있는 소쿠리를 내렸다. 약발이 듣고 있는데 약을 끊을 수는 없었다. 싸리나무 뿌리를 말려둔 것이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판국에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겉껍질을 벗겨 절구에 넣은 화성댁은 뭔가에 신들린 얼굴로 방앗공이를 쿵쿵 내려치기 시작했다. 딱딱한 것이 빻아지고 짓이겨지는 소리가 공이 끝에서 잘도 일어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엔 오로지 사위의 병을 고쳐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잠시 후 허리를 편 그녀는 다 빻아진 가루를 체에 곱게 쳤다. 계란 흰자위만 가루에 풀어 걸쭉하게 반죽을 했다.       

 “이건 싸리나무 껍질??.”

 보시기에 담긴 내용물을 본 민숙은 대뜸 아는 체를 했다. 어릴 적부터 부스럼이 나거나 종기가 나면 어머니가 조제해서 발라주곤 했던 약이었다.

 “그래. 김 서방 발라주어라. 금방 또 만들어 오마.”

 화성댁은 바르는 약이라도 열심히 바르다 보면 덧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 예, 예.”

 우선은 받아 쥐고 보았다.

 “먹고 바르고 해야 빨리 나을 텐데, 빨리 구해 보마.”

 구두덜거리며 소릴 죽여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 잠깐만요.”

 민숙은 저만치로 멀어져간 화성댁을 불렀다. 오늘따라 너무 왜소한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면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왜 그러냐?”

 몸을 반쯤만 딸에게로 돌렸다.

 “어머니, 이제 약 걱정은 하지 마세요.”

 마음속에 있던 말을 바로 털어놓았다.

 “안사돈이 약을 구해 오신 모양이구나.”

 화성댁은 활짝 웃었다. 그녀도 서울이 또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여주댁이 피난을 나오면서 약을 구해 가지고 왔을 것이라고 그렇게 야무지게 오해하고 있었다.

 “아,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알았다. 어미 걱정일랑 말거라.”

 “사실은 형식이가 다녀갔어요.”

 민숙은 화성댁의 눈치를 은근히 살폈다.

 “헛, 그래? 으음, 속도 배알도 없는 놈!”

 화성댁은 안타까운 신음소리를 섞어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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