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모롱이 돌아 부는 바람 끝자락 '가을'
산모롱이 돌아 부는 바람 끝자락 '가을'
  • 경남일보
  • 승인 2012.09.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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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연수사를 찾아서
길섶에서 한들거리는 코스모스가 정겨워지는 계절이다. 반가움의 설렘인지 그리움의 수줍음인지 아니면 미련 없이 떨치고 가라는 작별의 손짓인지 알 수 없는 정감에 가슴을 시리게 한다. 목이 가늘어 안쓰럽고 빛깔이 연해서 청순하고 수수하며, 홀로 깔끔하여 소박하고 고결한데 홑지고 가냘파서 애련함에 정이 겹다. 코스모스가 피어나는 이맘때쯤이면 호젓한 산길의 외진 길섶에는 그리움이 녹아들어 연보라로 피었는지, 아직은 먼 기다림의 저편에서 소복차림으로 흰 꽃 되어 피었는지, 외롭지 않으려고 저만치에 홀로선 청초한 들국화가 인적 드문 산길에 피어났을 생각으로 외진 길을 찾아서 감악산 연수사를 찾아 길머리를 잡았다.

가을길이야 어디를 가나 멋과 맛이 어우러져 느긋한 여유로움이 천지사방에 그윽하다. 산야의 빛깔이 짙은듯하면서도 야단스럽지 않아 그 색이 멋으로 좋고, 들판에서 우러나는 향긋한 내음과 산이 뿜어내는 상큼함의 그 향이 맛으로 더욱 좋다. 그래서 들길 질러 산길 돌며 물길 따라 이어지는 외진 길을 택하려고, 35번 고속도로 산청 요금소를 빠져나와 산청읍을 가로 질러 59번 도로를 따라 차항면 소재지 쪽으로 북진하며 차를 몰았다. 

산청읍을 벗어나면 고갯길의 모롱이가 겹겹으로 이어지며 돌고 돌면 또 다른 모롱이가 머리를 내밀고 먼저 나와 기다린다. 차항면 소재지에서 신원면 표지판을 따라 좌회전을 하면 좌우로 도열한 높다란 산자락을 틈틈이 깔고 앉은 올망졸망한 작은 마을들이 더 없이 고요하고 평화롭게 보이건만, 모롱이를 돌때마다 태풍 볼라벤과 덴빈, 산바가 연이어 할키고 간 흔적들이 한 두 곳이 아니고, 산모롱이의 길섶마다 아람이 벌어진 밤송이가 주인을 기다리듯 도로위에 떨어져있고, 바람에 부대낀 감나무에는 그래도 주먹만 한 감들이 볼을 붉히며 매달렸다. 산사태가 도로를 덮친 흔적 또한 여기저기 깔렸는데, 물길이 씻어 낸 개울의 바닥에는 골지고 파여서 들어난 반석들은, 주민들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재잘거리는 물속에 발꿈치를 담근 채 속살까지 들내고 가을 햇볕을 한 가득 안고서 반들거리고 누웠다.

소룡산 옆에 끼고 바랑산 넘어서면 구름도 애통하여 가던 길을 멈추고, 바람도 절통하여 숨죽이고 쉬어가는 월여산 기슭에는, 거창양민학살사건 피해자 추모공원이 빤히 건너다보인다. 6·25의 비극 속에 참극으로 얼룩진 애달픈 역사여라. 백옥 같은 순백색의 위령탑은 솟았건만 719위의 원혼을 무엇으로 달래며, 유족들의 맺힌 한을 무엇으로 풀어주나. 오가는 길마다 향 사르고 영면 빌며 이제는 잊겠노라고 다짐하고 돌아서면, 젖먹이 울음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높아버린 하늘에 무덕무덕 떠있는 구름을 치어다보며 갑갑한 마음을 다시 추스르고 발길을 돌렸더니 이내 신원면 사무소 앞을 지나 1034번 도로가 동서로 이어지는 과정 삼거리에 닿았다. 우회전을 하여 동진하면 합천호로 가는 길이라서 좌회전을 했다. 거창방면으로 3km 남짓 가다가 남상면으로 가는 삼거리 길에서 ‘감악산로’라는 도로명을 따라 남상방면으로 우회전을 했다. 2차선 포장도로는 완만하게 비탈진 산기슭을 따라 첩첩산중으로 들어가는데 또 하나의 안내판이 발목을 잡았다. 오른 쪽 둔덕에는 “청연마을 학살 터”이고 왼쪽으로의 양지바른 산기슭에는 기와지붕의 추모재 뒤로 근래에 조성된 묘역이 말쑥하게 자리했다. 새까만 묘비는 울긋불긋한 조화 한 묶음씩을 앞에 두고 층을 지워 횡으로 줄지어 섰는데 “정두성의 묘” 라는 묘비의 측면에는 “생 1948. 3. 15, 졸 1951. 2. 9” 라고 하얗게 음각돼 있으니 네 살배기가 아닌가. 찹찹한 마음으로 길 건너편의 학살터에 홀로선 보존비 앞에다 종이컵에 술 한 잔 따라 놓고 고개를 숙이니 그냥 지나칠까했던 미안함이 얼마나 무거웠던가를 알만큼 가벼움이 느껴졌다.

코앞의 고갯마루 삼거리에 청연마을 표지석이 낮은 키로 섰고 감악산 4km라는 KBS 감악산중계소와 연수사 1km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란하게 높이섰다. 

이정표의 안내를 따라 비탈진 산길을 잠시 오르면 감악산중계소와 연수사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오고, 목마른 이들을 위한 약수터가 작은 쉼터로 잘 정비되어 오가는 등산객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연수사 가는 길로 접어들자 너덜겅 돌 틈새로 연보라와 순백의 들국화가 듬성듬성 피어있어 청초한 자태는 그리움에 젖어있다. 송송이 어우러진 오상고절의 노랑국화가 아니라 구절초나 개망초라도 좋고 쑥부쟁이라고 해도 상관할 일이 아니다. 언제 보아도 청순하고 순박하여 애련한 정감이 녹아나는 꽃이다.   

풀벌레 소리에 길어지는 밤을 새며

달빛에 젖어서 연보라로 물든 채로

보내고 정 그리워 숨은 듯이 홀로 섰나.

청량한 바람에 한들거리는 들국화의 손짓을 따라 산중턱에 닿으니, 주종인 도토리나무가 온갖 수목들과 한데 어우러진 숲길 사이로 화려한 단청의 일주문이 빤히 보인다. 일주문 앞의 주차장은 꽤나 널따랗고 원추형의 돌탑은 커다란 은행나무 밑에서 참선에 몰입되어 오고가도 모른다. “감악산 연수사”라는 현판의 일주문을 들어서서 돌계단을 오르니 대웅전 전각이 또 다른 돌계단과 축대위에 웅장하게 우뚝 섰다. 고색창연한 천년고찰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으나, 신라 애장왕3년 서기 802년에 감악조사가 절을 지으려고 다듬어 놓은 커다란 서까래들이 밤새 몰래 옮겨진 자리에 절을 지었다는 설과, 헌강왕이 약수를 마시고 병이 나아 감사의뜻으로 절을 세웠다는 설이 구전으로 전해질 뿐, 기록상으로는 조선 숙종 때 벽암선사가 연수사를 중수하였다는 연혁의 안내판이 대웅전 뜰 앞에서 일러주고 섰다. 좌우의 당우와 집채만 한 바윗돌을 사이에 두고, 칠성각과 산신각이 한 지붕에 앉았는데 옆으로 세석산방이 없는 듯이 자리 잡아 여느 산중의 절집과도 엇비슷하건만, 산방 앞의 약수는 신라헌강왕의 중풍을 낫게 한 이름난 약수란다. 암반에 베개 크기만 하게 네모나게 파인 돌샘으로 납작한 구멍에서 콸콸 쏟아져 내리는 약수 한 쪽박을 단숨에 들켰다. 매끄러워서 부드럽고 뒷맛이 단듯하다. 함양, 산청, 합천군내의 주민들은 담배농사를 짓다보면 피부질환을 심하게 앓았는데 담배수확을 끝내고 나면 연례행사처럼 날을 잡아서, 도로가 뚫리기 전이라서 솥단지를 이고지고 피난행렬처럼 몰려와서 수제비 끓여 먹으며 약수를 마시고 몸을 씻어 나았단다. 주지 석전스님은 이들을 위해 노천에다 남탕과 여탕을 갈라서 물맞이 장소를 꾸몄다고 설명하는 보문스님은, 일주문 옆의 수령 600여년의 노거수인 은행나무의 유래까지 자상하게 일러줬다. 

고려말의 왕족과 혼인하여 망국의 한을 안고 유복자를 앞세우고 연수사를 찾아와, 왕조의 명복을 빌고자 머리를 깎고 비구승이 되면서, 아들과 작별하며 아들은 전나무를 심고 어미는 은행나무를 심어, 훗날에 나를 보듯 하라했던 은행나무는 수고 38m에 둘레가 7m로 아직도 무성하게 잎을 피고지우며, 비운의 넋을 하염없이 달래며 애환으로 굽이진 기나긴 역사를 오늘에 잇고 섰다.

대웅전 주련의 “삼일수심천재보 백년탐물일조진” 삼일 동안 닦은 마음은 천 년의 보배가 되고, 백 년 동안 탐한 재물은 하루아침에 티끌이 된다하여 높아져서 파래진 하늘을 쳐다보니 흰 구름은 갈 곳 몰라 무심하게 떠있었다.  /지역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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