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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최초 어린이 축구교실… 영재 발굴 앞장허정기가 쓰는 진주체육사 <4>진주체육 도약기(1961~1980)(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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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9.2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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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진주시체육회 사무실이 있던 구)진주시청(본성동) 별관 자리. 지금은 진주시청소년수련관이 들어서 있다.
권창세씨 다음으로 리영달씨가 진주축구협회장을 맡아 협회장배를 기증했다. 이에 따라 조기회축구대회는 노장 부문은 권창세배, 소장부문은 협회장배를 놓고 열리게 됐다. 또한 새마을 사업이 한창이던 70년대 초반 시내 동대항 축구대회가 열리기도 했는데 입장상에 시멘트 500포, 응원상에 500포 등 많은 상품이 내걸렸다. 그리고 한해동안 진주축구발전에 공이 큰 사람에게 리영달축구상이 주어졌다. 축구상을 제정 시상함으로서 축구고장의 위상을 높였으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전국에서 최초로 초등학교 4~6학년을 대상으로 한 어린이축구학교가 개설됐다. 방학기간동안 운영된 이 학교는 김원섭, 김연구씨가 지도하여 재질 있는 축구선수를 조기 발굴하여 그 기량을 개발함으로써 최청일 선수 등 국가대표선수를 배출하기도 했다.

김용하씨의 강력한 권유로 리영달씨는 모교도 아닌 진주고 축구 후원회를 맡기도 했다.

그리고 진주농고가 1973년 12월 진주농전으로 승격 개편됐다. 이에 따라 진고:농고의 축구대결은 볼 수 없게 됐다. 그렇지만 진주축구협회가 진주고:진주농고 OB 축구대회를 개최하여 양교 선배, 재학생들의 뜨거운 응원 속에 이틀간 경기를 가진 바 있으나 단 1회에 그치고 말았다.

부산일보 진주지사(지사장 신산부)가 주최한 3.1절 기념 진주-부산 역전 마라톤대회는 육상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74년 진주체육회는 사무실을 전 중앙극장 별관(정봉주 사장 무상 제공)으로 이전했다. 이때 진주에 검도부가 신설된다. 김재한씨가 검도사범으로 초빙됐다.

1976년 김태석 진주체육회 사무국장이 도체육회(당시 부산 소재) 사무국장으로 영전되고, 후임 사무국장으로는 최학희(진주농전 교수)씨가 무보수 사무국장으로 부임하고 체육회 사무실을 구)진주시청(본성동) 별관으로 옮기게 됐다.

또한 연식정구는 백구회가 조직이 돼 진주고교 정구장에서 정원용 교장, 이기준, 정성용, 허남벽, 이명길, 강대진, 김호열, 이우현씨 등이 중심이 돼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러나 테니스가 도입되자 차츰 테니스로 전향하게 됐다. 특히 선명여상은 테니스부를 창설, 이재호 코치를 영입하여 선수들을 집중 훈련시킴으로써 이정순, 빈미남 등 우수한 선수를 많이 배출했다.

1968년에 개국한 진주문화방송에서는 축구 고장 진주의 축구 전통을 되살린다는 취지 아래 전국 규모의 축구대회 개최를 추진했다. 그 결과 1972년 문교부장관배 전국고교축구대회 및 도내중학교 축구대회를 전국체육대회, 중고연맹전, 경향신문 대통령금배대회, 동아일보 시도대항전, 조선일보 선수권대회, 부산일보대회, 부산문화방송대회에 이어 아홉번째 전국규모 축구대회로 공인받는 성과를 거뒀다.

당시 필자는 직접 기획하여 당시 최식림 사장에게 승락을 얻은 뒤 대회 승인을 받기 위해 서울 대한축구협회(당시 서울 무교동 소재)를 직접 방문했다. 당시 고태진(조흥은행장) 대한축구협회장을 비롯한, 이수환 전무, 정일진 총무 등은 시골 진주에서 어떻게 전국대회를 연례행사로 할 수 있겠는냐며 부정적이었다. 선뜻 승인을 해주지 않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에 필자는 당시 진주출신 국회의원인 구태회 공화당 정책위 의장에게 사정을 밝힌 뒤 구 의장의 도움으로 민관식 문교부 장관 승인을 받았다. 드디어 1972년 9월 제1회 문교부장관배 전국고교초청축구대회(진주MBC가 숙식, 교통비 부담)가 열렸다. 서울에서 대신고교(감독 이동진), 영등포공고(감독 윤재봉), 한양공고(감독 우상권), 중동고교(감독 유판순) 등 당시 고교축구 강호 4개팀과 진주고교(감독 신철순), 마산공고(감독 정일진), 부산 동아고교(감독 박경화), 현풍고교(감독 남기택·전 진주농고 감독) 등 8개팀이 2개조로 나누어 조별 리그전을 치루었다. 중학부에는 진주중, 진주남중, 부산 동래중(감독 박두옥·전 진주중 감독), 거창 대성중학이 출전 했었다. 진주에서는 전국고교축구대회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대회가 열리는 날에는 진주중학을 출발해 진주공설운동장에 이르는 시가행진을 벌였는데 각 기관과 학교에서는 출전팀과 자매결연을 갖고 대회 당일 열띤 응원을 보내 주고 음료수를 제공하는 등 진주를 찾아 온 외지팀들을 격려해주는 등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첫회 우승을 차지했던 영등포공고에는 국가대표 감독을 지낸 허정무, 중대부고에는 현 대한축구협회 파주훈련장 책임자 조영증, 동래고에는 손종석(전 대구대 코치), 동래고 박상인, 현풍고 남기택·박용주(전 국가대표), 마산공고 장기문(전 천안농고 코치), 진주고에는 조광래(전 월드컵 대표팀 감독) 등 전국 고교에서 기라성같은 선수들이 출전했었다.

제1회 고교대회 우승은 영등포공고, 준우승은 부산동래고, 3위에는 부산동아고가, 중학부에서는 우승 부산동래중,  준우승은 진주중학이 각각 차지했었다. 당시 공설운동장은 관람석도 완벽하지 못했지만 진주를 비롯한 서부경남의 많은 축구 팬이 연일 그라운드를 메워 뜨거운 축구열기를 실감할 수가 있었다.

72년의 제2회 대회는 여름철인 7월 18일부터 22일까지 연닷새 동안 2개조별 리그전을 가졌는데 서울의 경희고, 영등포공고, 중동고, 한양공고, 강원도의 강릉상고, 충남의 대전상고, 부산의 동아고, 우리고장의 진주고 등 8개팀이 참가해 1차대회 보다는 많은 지역별 강호들이 출전했었다.

특기할만한 일은 진주고는 그 동안 축구부가 해체돼 있다가 김용하씨가 다시 팀을 구성했다. 당시 1948년 런던올림픽에 우정환씨와 같이 참가하고 1964년 도쿄올림픽 국가대표팀 코치를 맡았던 김규환씨를 코치로 초빙, 축구팀을 재건해 전국대회를 세 번이나 석권했는데 막상 홈그라운드에서는 입상을 하지 못했다. 당시 진주고는 감독에 신철순씨가 맡았고, 선수로는 박영권, 조광래, 천상필, 강창수, 이영갑, 김환수, 하만갑, 김성구, 정삼만 등이 출전했다. 2회 대회에서는 영등포공고와 동아고가 공동우승을, 한양공고가 3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진주MBC대회가 가장 경기운영이 공정하다는 좋은 평을 받기도 했었다.

제3회 대회는 73년 9월 14일부터 18일까지 12개팀이 출전해 토너먼트식으로 5일 동안  열렸다. 진주대아고가 처녀 출전했으며 대구의 대륜고, 청구고, 전주의 전주공고, 서울의 한영고, 부산의 영남상고가 첫 출전했었다. 첫 출전한 청구고가 우승했고, 준우승은 대전상고, 3위는 진주고가 차지했었다.

중학부에서는 김해중, 생초중, 신안중, 마산중앙중, 통영중, 함안중, 산청중학이 출전했었는데 우승은 진주중, 준우승은 산청중이 차지했었다.

그리고 진주 농대가 종합대학교로 승격하기 전 복합대학(학장 윤태규)으로 있을 때 리영달 축구협회장이 축구도시 진주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대학에서 축구부를 발족시켜 줄 것을 건의했다. 이에 따라 진주에서는 최초로 대학 축구팀이 탄생하게 됐으며 지도교수에 김점만 교수, 감독에 고봉우씨가 맡고, 선수는 진주고 출신을 주축으로 마산 창신고, 부산상고 출신 선수들로 구성됐다.

진주문화방송에서는 경남테니스대회를 개최하여 선수경력에 따라 일반부, 청장년부, 노동부, 여자부를 A,B,C조로 나누어 대회를 운영하여 누구나 쉽게 참가할 수 있도록 했으며 지금까지 개최해 오고 있다.

경상대학은 그 뒤 종합대학교로 승격되면서 그 이전에 육성하고 있던 축구부 이외에 육상, 테니스(여자), 정구, 검도, 태권도, 배구, 복싱, 조정, 씨름, 수영, 탁구부 등을 육성해 진주 체육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됐으며 도민체육대회에서 진주시가 상위에 입상하는 데 경상대학 선수들의 역할이 크게 기여했다..

씨름은 진주 남중-진주상고-경상대학으로 이어지는 연계 육성으로 전통의 진주 씨름을 다시한번 전국에 그 이름을 떨치게 된다. 학교 씨름을 창단한 초기에는 김사옥(대동공업 사장)씨 집(동성동 소재) 씨름장을 이용했다. 당시 경량급으로 이름을 떨쳤던 전재성씨가 감독을 맡아 선수들을 훈련시켜 우수한 선수를 많이 배출했으며, 제자들은 지금 교단에서 씨름지도자로, 중계방송 해설자로 활약하고 있다. 당시 배출된 선수를 보면 고 최욱진 장사를 비롯해 강주석, 김삼식, 차경만, 황영호, 박종대, 이기수, 김칠규, 김윤갑, 김태호 등이었다.

그리고 1981년 진주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국가대표 축구선수로 선발돼 1948년 런던올림픽과 1954년 스위스월드컵대회에 출전했던 진농 출신(보성전문 졸) 우정환 선수의 축구비 설립이 진주축구동우회, 진농총동창회, 고려대 교우회를 중심으로 추진돼 1981년 진주시 신안동 공설운동장 앞에 세워졌다. 비문에는 “번개처럼 빠른 날쌘 철각과 무적의 드리블에다 총알 쏘듯 한 슈팅의 의력으로 한국 축구여명기의 갈색포탄 같은 골로 기여했고, 오늘 세계 프로축구의 어디에 내세워도 뛰어난 별일 것임을 세상이 애석할 바다”라고 새겨져 있으며, 진주체육인의 귀감이 되고 있다.

/전 진주문화방송 편성국장, 진주시체육회 부회장

경남·진주축구협회 부회장

 

▲진주공설운동장 앞에 설치돼 있는 우정환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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