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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운드 승부사, 고향 앞에 서다<경남축구열전> 김호 감독 (상)
임명진  |  sunpower@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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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10.1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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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03주년을 맞아 본보에서 한국 근현대 축구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경남 출신 축구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경남축구열전을 게재한다. 그 첫 번째 자리를 메울 주인공은 통영 출신의 김호 감독. 김 감독은 한국프로축구 출범과 함께 K리그 수원삼성블루윙즈의 르네상스를 연 인물이다.

태극전사를 이끌고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스페인, 독일을 맞아 2무1패를 기록하며 2002년 한일월드컵 이전까지 대표팀 최고의 성적을 일궈냈다. 국내 축구 지도자 중에서 통산 200승 우승 고지에 가장 먼저 올랐고, 1999년도에는 수원을 이끌고 그해 전관왕 우승이라는 프로축구사상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수립했다.

김호 감독의 파란만장한 축구인생 열전을 상·하 두 편에 걸쳐 독자에게 전달한다./편집자 주



야인(野人) 김호(68). 평생 승부사로 외길을 걸어온 김 감독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호칭이다. 일흔을 바라보는 노년이 된 지금, 김 감독은 또 다른 야인의 길을 걷고 있다.

고향 통영에서 한국 축구계를 이끌어 갈 꿈나무들 지도에 값진 땀을 흘리고 있다. 통영 앞 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항남동 부둣가에서 김 감독을 만났다.

◇이 먼데까지 어찌 왔노

'한국의 나폴리'라 불리는 아늑한 통영의 멋스러움에 한없이 빠져들 무렵, 김호 감독이 약속장소로 들어섰다.

"이 늙은 사람이 뭐라고 이 먼데까지 왔노, 해줄 말이 뭐가 있다고. 온다고 고생 많았제. 허허"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궁금해 하는 팬들이 많아요."

"나야 고향에서 잘 지내고 있지. 손주뻘 아이들에게 축구도 가르치고 친구들도 만나고, 즐겁고 좋지."

국가대표팀 감독에다, 국내 최고의 프로축구팀을 이끌었던 그는 고향에 정착한 후 손주 같은 유소년을 지도하고 있다.

유소년 지도에 어려운 점은 없냐는 질문에 김 감독은 "많이 있지. 인재 육성 차원에서 미래를 보고 지도자 육성이라든지 체계적인 지원을 나라에서 좀 해줬으면 하는데 이런 게 잘 안 돼 있어. 난 시에서 어느 정도 지원을 해주고 있으니 좀 낫긴 하지만…"

유소년을 잘 교육시키기 위해선 훌륭한 지도자가 가르쳐야 하는데, 지도자들 영입하고, 교육하는데 드는 지원과 투자가 못내 아쉽다는 것이 김 감독의 설명이다.

◇라디오 축구중계 듣고 축구 입문

사실 김호 감독을 처음 만난 것은 재작년께 진주에서 열린 전국 축구대회에서다. 당시 김호 감독은 K리그 대전 감독을 그만둔 지 꽤 시간이 지났지만 그를 알아본 관중들로 축구장이 들썩거렸다.

김호 감독은 포근한 마음씨를 가졌다. 축구 팬들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팬이 있어야 프로축구가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고, 특히 꼬마 축구팬들에게는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사인요청은 물로 기념촬영까지 시간을 쪼개서라도 일일이 응해준다.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를 시작하셨다고 알고 있는데요."

"원래 두룡초등학교에서 육상선수였어. 발이 남들보다 무척 빨랐거든. 어렸을 때 집에서 라디오 중계를 들은 적이 있는데, 자유중국(지금의 대만)하고 우리하고 경기를 하는 거야. 우리가 1대3으로 졌어. 당시 홍콩은 영국령인데, 프로선수들이 홍콩에 많이 있었어. 근데 이 프로선수들이 국제경기에는 자유중국으로 나오는 거야. 우리가 지는 걸 보고 어찌나 화가 나든지. 아, 내가 축구를 해야 겠구나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축구를 시작하게 됐지."

김호 감독의 승부사적 기질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렇게 축구를 시작한 김호는 빠른 발로 운동장을 누비고 다녔다.

◇고교시절, 인생 멘토를 만나다.

"축구는 함께 헤쳐 나가고, 조직적으로 해 나가는 굉장히 재미가 있었어. 그렇게 통영중, 통영고로 진학해서도 축구를 계속 했어. 나름 주목을 받고서 말이야. 근데 문제가 생겼어. 통영고 축구부가 1학년 때 폐지가 되어 버린 거야."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어쩌긴, 통영에서 축구를 하고 싶었는데 별수가 없잖아. 부산 동래고로 축구 유학을 간 거지. 그곳에서 내 인생의 멘토를 만났어. 안종수 선생님이라고, 참 훌륭한 분이셨어. 그래서 축구를 더 열심히 할 수 있었지. 원래 내 포지션이 공격수인데, 그 분은 수비도 시키는 거야. 그때는 몰랐는데, 선생님이 보는 눈이 정확했던 거지. 자네는 수비를 하면 아주 좋은 선수가 될 거라고 하시는 거야. 그래서 수비수로 전향했지."

고교 무대에서 진가를 날리던 김호 감독은 대학 진학 대신 스승 안종수 선생의 조언으로 실업팀인 제일모직으로 곧바로 입단했다.

"당시에는 서울로 간다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 이었어. 그때는 대회 자체도 많지 않을 때이고, 서울에는 내가 많이 알려지지 않을 때였으니깐, 진학 당시에 선생님이 실업팀인 제일모직 감독으로 가시면서 나를 데리고 간 거지. 그때 우리 집이 가정형편이 좀 어려울 때였거든."

실업무대에 데뷔한 김호는 곧바로 선발에 경기로 출장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나이가 어리다 보니 더 열심히 뛰었어. 할 줄 아는 건 축구 밖에 없으니깐."

타고난 근성과 절대적 훈련량이 많았던 김호는 당시 연고대 출신이 휘어잡던 축구계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알려나갔다. 그리고 고교졸업 8개월 만에 국가대표가 될 기회가 주어졌다.

◇국가대표 부동의 수비수

하지만 스승의 반대로 국가대표에 곧바로 선발되지는 못했다.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 옳은 대표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더 배워서 가야된다고. 처음에는 너무 슬펐지. 그런데 말이야. 시간이 지나서 보면 선생님의 결정이 옳았다는 걸 알 수 있었어. 그분의 그런 뜻이 오늘의 나를 있게 만 든 거야."

선수시절 우여곡절도 많았다.

"지금은 많이 완화됐지만, 그 시절엔 연고대, 이북 출신이 축구계에 많았었어. 당시에는 지방출신은 나 혼자였다시피 했으니깐, 피부로 느껴보지 못한 그런 것들을 많이 체험했지. 어찌 보면 나로 인해 지방출신 선수들이 많이 알려진 셈이지. 물꼬 역할을 했다고 할까. 그러기 위해선 정말 피나게 연습하고 훈련하고 그랬어. 나로서는 무언의 어떤 시위라고 할까. 그 힘든 시절을 잘 견뎌낼수 있었기에 오늘이 있는 거지."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하고 조련했다. 그리고 1965년 꿈에 그리던 국가대표 선수가 됐다.

김호 감독이 활약하던 당시 한국대표팀에게 아시아 무대는 비좁았다. 킹스컵 우승, 메르데카배 3연패 등 아시아 무대서 대회마다 우승을 독식했다. 아시안 게임 최초 우승도 일궈냈다.

그의 선수생활은 제일모직을 시작으로 해병대 축구단, 상업은행, 포항체절을 끝으로 34살의 나이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리고 축구인생의 기로에서 모교서 지도자 제의가 들어왔다.(못 다한 글은 하편에서)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사진=황선필기자

▲김호 감독은

출생 1944년생(통영)

학력 통영 두룡초-통영중-부산 동래고

선수 경력 제일모직-해병대 축구단-상업은, 국가대표(1965~1973년)

지도자 경력 한일은행 감독(1983~1987)― K리그 울산현대(1988~1991년)―국가대표 감독(1992~1994) 미국월드컵 참가-수원삼성(1996~2003)―대전 시티즌(2007~2009)

수상경력-리그2회, FA컵 1회, AFC 2회 등 다수 우승컵, 1999년 전관왕 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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