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학수 (수필가·산청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
우리의 일상에는 과거로부터 이어온 것 중에서 현재에 도움이 되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전자를 전통이라고 하면 후자는 인습(因習)일 뿐이다. 또한 문화는 인간의 지혜가 깨우쳐져 좀 더 이롭고 편리하며 진보된 삶을 이룩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그 시대에는 하찮은 궤변이나 별것 아닌 것처럼 버려져 왔으나, 훗날에는 훌륭한 문화와 전통으로 여겨지는 것도 수없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은 시공을 거치는 동안 역사적 사실과 시대의 인식에 따라 파괴되는가 하면 새롭게 창조되기도 한다.
잘 알다시피 조선 정조 때 박지원(朴趾源)의 실학과 개혁사상은 그 시대 고루한 학자들로부터 해괴망측한 비판을 받고 외면과 설욕을 당하지 않았던가. 그것뿐이 아니다. 원효(元曉)는 그 당시 민중불교의 창시자로서 신라통일의 정신교훈을 심어 주었지만, 땡땡이중이라는 평판과 수군거림을 면치 못하였다. 이 모두가 세월이 흐른 지금에서는 심오한 학문과 불교교종의 반석이 되었으며, 민족의 유구한 전통과 찬란한 문화를 꽃 피우지 않았는가.
그렇지만 어느 단체 어떤 행사라도 초대장의 배경에 명예와 규모를 과시하고 봉투 계산과 연관되는 물질적 저의가 있다면, 그것은 전통문화와 순수예술을 해치는 구시대의 인습으로 전락되고 만다. 기우이지만 아직도 우리의 소개문화와 찬조 기부문화는 아름다운 전통이 아니라 번잡한 속성으로 고칠 것이 너무 많다. 만약에 행사 당시에 농번기 바쁜 틈을 내어 땀 흘리고 달려온 참여 노옹이 있을 때엔, 그가 진짜 열성 귀빈이므로 그 사람 이름을 한 번쯤 불러주면 그 얼마나 영광이며 향기롭고 서민적일까.
흔히 말하는 양반문화와 선비문화는 근본부터 판이하다. 선비문화는 오직 선비정신의 유일한 덕목인 고고한 양심과 청렴과 정직인 것이다. 그런데 요즘의 선비는 외양의 치장이나 품위를 중시하고 이해와 사심이 발동하여 내면의 성찰이 부족한 것 같다. 모름지기 선비는 갈 곳을 가야 하고, 할 말을 골라 하며, 볼 것을 정선하는 그야말로 수신제가(修身齊家)부터 실천궁행(實踐躬行)이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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