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여탕 풍경
우리 동네 여탕 풍경
  • 경남일보
  • 승인 2012.1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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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진희 (진주 문산초등학교 교사)
우리 동네에는 신구 문화가 공존하는 곳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는 부엌 너머로 과수원이 보이고 가을 풍경도 공짜로 실컷 즐길 수 있다. 지금은 주황색 탁구공 같은 감이 조랑조랑 달린 과수원이 내 눈을 즐겁게 한다.

그리고 동네에는 햇볕 잘 드는 곳에 자리 잡은 천○탕이라는 목욕탕이 있다. 엄청 오래되었다. 그 오랜 역사가 말해주듯 목욕탕에 오는 손님도 내가 보기에는 50대 이상이 주를 이루는 것 같다. 나는 주로 그 곳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의 새로운 지식과 정보들을 섭렵하고 있다. 특히 경제적인 면에서는 쏠쏠한 정보를 많이 얻어다가 생활에서 유익하게 활용한다.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길목의 일요일 아침이면 동네 목욕탕은 더욱 북적인다. 손님이 많든 적든 온탕의 뜨끈한 물속에서나 한증실에서는 생활 속 정보들이 계속 쏟아진다. 지난 유월에 담근 매실장아찌와 마늘장아찌도 여탕에서 들은 비법으로 성공했다. 어제는 고구마에 대한 이야기와 모 학교에서 일어났던 폭력에 대한 내용이 화두였다. 그리고 “학생이 선생님을 욕하고 때리고 선생님도 학생을 때렸다”는 기사거리는 제법 연세 많으신 어르신이 자신의 경험담을 예로 들면서 젊은이들에게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된다, 선생님을 존경해야 자식교육도 제대로 된다며 성공담을 피력하였다.

나는 BC 5~4세기에 활동한 그리스의 강연자·문필가·교사였던 소피스트(Sophist:지혜를 가르치는 교사)들이 우리 동네에도 있다고 생각한다. 젊고 늙음에 관계없이 소통되는 우리 동네 여탕의 손님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이 주고받던 그 지혜와 정보, 가르침은 그리스 사회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이끈 유일한 원천이었고 르네상스 시대에 부활하는 인문주의의 수준을 한껏 높이게 한 원동력이었다. 우리 동네 목욕탕에서도 나이 많은 어르신에게서 덕과 지혜를 배우고 좀 젊은 새댁에게서는 내가 알지 못했던 사회현상을 얻게 되니 내게는 그들이 바로 소피스트들이 아닌가! 더구나 옷이나 화장 등으로 치장하지 않아 아무 귀천이 없다. 아무 속셈도 없이, 아무 숨김도 없이, 그리고 굳이 포장할 필요도 없어 알고 있는 사실들을 가감 없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때로는 비평가로, 때로는 저널리스트로, 또 소피스트로의 역할이 주어진다.

그리고 여탕 안에서는 3000원에 한 양푼 주는 달달한 커피가 있다. 10명 정도 갈라 먹을 수 있게 출렁이는 양과 플라스틱 컵도 따라 나온다. 우리 동네 목욕탕에서만 볼 수 있는 정 헤픈 마음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3000원으로 커피 한 턱 쏘는 마음의 여유가 덤으로 생기는 곳이다. 행복이 있고 지혜를 나누어 주는 소피스트가 있는 우리 동네 여탕은 서로 바라만 보아도 좋은 내 이웃이 만든 삶의 우물가이다.

/진주 문산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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