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특집 > 윤위식의 기행
동서 두 탑, 옛 이야기로만 남은 대가야 추억(35) 월광사지와 천불산 청량사
경남일보  |  gnnews@gnnews.co.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2.11.13  00:00:00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청량사 석등과 석탑

청량사 석등과 석탑

 
정겹게 따사롭던 날씨가 입동을 지나자 아침기온이 제법 쌀쌀맞아졌다.

나름대로 어우러져서 저마다의 빛깔로 화단을 물들였던 꽃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어느새 초라해져버린 작은 화단에는 노란 소국이 간밤에 내린 하얀 무서리를 고스란히 맞은 채, 서로의 뺌을 다닥다닥 붙이고 아침햇살을 기다리고 있어 한낮의 날씨가 쾌청할 것 같아 만추의 산길이나 걸어볼 요량으로 홀가분한 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해인사IC를 빠져나오자 왕복 4차로의 해인사길이 시원스럽게 뻗어있고, 멀리 오른쪽에는 가야산이 그리고 왼쪽으로는 매화산이 희끗희끗한 바위들로 뾰족뾰족하게 날을 세우고 마주서서, 사이사이로 단풍의 빛깔이 아직도 영롱한 작은 봉우리들을 거느리고 있어, 마치 천군만마를 거느린 쌍방의 장수가 일촉즉발의 일전을 앞두고 숨을 고루는 것인지 아니면 청홍의 군기를 빼곡하게 든 군졸을 이끌고 의기양양하게 개선하는 두 장수의 위용인지 장엄한 광경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풍광의 운치를 즐기면서 쉬엄쉬엄 차를 몰아 2Km남짓 갔을까 하는데 빤히 건너다보이는 왼편 산기슭 모퉁이의 끄트머리에, 도랑을 끼고 선 서너 그루의 낙락장송이 병풍 속의 그림 같이 예사롭지 않은 풍경이여서 차를 세웠더니, 월광사라는 표지판이 진작부터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좌회전을 하여 월광교 앞의 널따란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동서로 마주한 희끄무레한 두기의 석탑이 아름드리 노송 아래서 삿갓 쓰고 바랑 멘 노승 같은 모습으로, 가야 매화 양산을 끼고 흘러온 홍류동 계곡물인 가야천 건너에서 수심에 잠긴 듯이 홀로 찾은 탐방객을 하염없이 지켜보며 미동도 않고 섰다.

버린 듯이 외진 곳에 감춘 듯이 숨어 있는 월광사지의 삼층석탑은 세월의 풍상이 버거워선지, 찾는 이가 없어서의 외로움인지, 얼핏 보아도 적적함이 배어난다. 왠지 연방이라도 “휘-후”하고 긴 한숨이라도 내쉴 것 같은 불탑이다.

두 탑의 풍채는 수려하고 준수하며, 날렵한 옥개석은 굽과 선이 정교하여 빚은 듯이 간결하고, 층층으로 이어지는 균형의 조화는 눈가는 곳 없이 섬세하여 아름답고 헌칠하여 웅장하고 장엄하다. 동탑과 서탑이 마주한 거리를 보아 천년고찰의 대가람이 있을 법 하나 그 옛날의 월광사는 흔적조차 없어지고 근작의 아담한 절집이 옛이야기를 간신히 이어오고 있는데 안내문 몇 줄에는 대가야의 마지막 왕인 도설지왕인 월광태자가 사직이 패망하자 이곳에다 절을 지어 월광사라 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며 높이 5.5m의 전형적인 신라탑의 모습으로 보물 제129호라고만 달랑 적혀있다. “그렇구나” 하고 지나치기엔 가슴 아픈 사연이 아니었던가. 대가야의 찬란했던 철기문화와 동서교역으로 일구었던 부귀와 영화 속의 500여년사직을 신라에 빼앗기고 등극하실 귀한 몸에 먹장삼을 걸치고 물을 적셔 삭발하던 태자의 심경은 어떠하였으며, 밤새도록 무릎 꿇고 염송하고 절하면서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었을까?

원이 맺혀 돌이 됐나 한이 맺혀 탑이 됐나

등극하실 귀한 몸에 먹장삼이 웬 말이며,

500여년 종묘사직 일장춘몽 꿈이었나.

만조백관 어디두고 외진 곳에 홀로 섰나.

청량사 석조여래불
청량사 석조여래불
 
 
동탑이 태자라면 서탑은 태자비일까, 저만치에서 마주보고 섰건만 서로를 안쓰러워하며 기나긴 침묵은 천오백년의 끝없는 세월로 이어오고 있다. 두 손 모아 합장하고 몇 번이고 절을 해도 개운치가 않아서 먼 산을 한동안 쳐다보았다. 태자의 고영을 달래려는 것인지 고산준봉들이 야트막한 작은 봉우리들을 올망졸망 앞세우고 둥그렇게 둘러서서 동서 쌍탑을 향해 머리를 조아린다.

두고 떠나기 아쉬운 사연 많은 비경을 뒤로하고 산길을 걸으려고 청량사를 찾아서 발길을 돌렸다.

월광사에서 십리길 정도나 될까하는 가야면 소재지에 닿으니까 때마침 5일과 10일에 선다는 가야5일장이었다. 가을걷이를 끝내서인지 꽤나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시끌시끌한 골목마다 오곡과 과일 말고는 이름도 모르는 열매와 초근목피의 약초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안 살듯이 흥정하고 안 팔듯이 덤을 주며 사고파는 모습들은 우리의 할머니셨고 우리의 어머니시던 그리운 이들의 애환서린 일상이었기에 아련한 향수에 젖어보았다. 그저 아프지나 마시라는 당부만 남기고 장터를 벗어나면 이내 매화산 등산로를 알리는 표지판이 왼쪽 길로 내려서서 홍류동 계곡물인 가야천을 건너라고 일러준다. 코앞에 있는 다리를 건너서 매화산로를 따라 잠시만 가면 청량사로 들어가는 길이 마을 골목길을 겸하고 있어 조심스레 골목길을 벗어나니 작은 저수지가 매화산 끝자락에 나직하게 내려 앉아 사방은 괴괴하고 새벽 같이 고요했다. 일렁임 한 점 없이 새파란 물속에다 대칭으로 반사된 오색단풍의 영롱함이 한없이 황홀한데 숨이 막힐 듯 한 고요한 정적만이 흐르고 있어, 나뭇잎 하나만 떨어져도 ‘챙그랑’ 하고 유리창이 깨어지는 소리가 날 것 같다. 멀리 매화산 정상의 기암괴석들은 늦가을 햇볕을 받아 그림같이 선명하고 양편 아래의 능선들이 겹겹이 맞모아진 골짜기에는 오색찬란한 꽃송이들을 한가득 쓸어다 부었는지 영롱한 빛깔이 골을 메웠다.

예서부터 걷기로 하고 굽이진 길로 접어들자 이미 떨어진 낙엽들이 길을 덮었다. “낙엽 밟는 소리가 좋으냐?”고 ‘레미 드 구르몽’은 ‘시몬’에게 물었지만 홀로 걷는 길손은 그저 아무라도 불러와서 아무 말도 묻지 말고 실컷 보여나 주고 싶다.

청색과 홍색이 어우러지고 적색과 황색이 비비대는 숲길을 따라, 간절한 소원을 알알이 쌓아 올린 돌탑을 사이에 두고 한참을 오르면, 천년고찰인 ‘천불산 청량사’가 매화산의 준봉들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중생을 반겼다.

설영루 계단을 오르면 좌우로 당우를 사이에 두고 마당이 꽤나 넓은데 맞은편으로 축대를 끼고돌아 대웅전 마당으로 들어서면, 하얗게 빛이 바랜 화강암의 석등과 석탑이 나란하게 마주섰다. 크기도 굉장하지만 풍기는 멋의 아름다움에 감탄을 멈추질 못했다. 사면기단석위로 팔면하대석에 연화좌대를 경쾌하게 받힌 석등의 조각은 아기자기하면서도 위엄까지 갖추었고, 석탑의 간결한 멋과 균형의 조화는 신의 손이 아니고서야 분가루로 빚어 낸 듯 이토록 매끈하게 다듬었나 싶다. 보물 제253호인 석등과 보물 제266호인 석탑을 앞세우고 높이 솟은 대웅전 뒤로 희끗희끗한 기암괴석들이 제마다 온갖 형상의 부처의 모습을 하고 빼곡하게 준봉을 이루고 있어 천불산이라 했음을 쉽게 알게 한다. 물욕의 저편에서 오로지 중생제도로 자비하신 부처님도 심산절경만은 탐하지 않을 수 없으셨던가?

고운 최치원선생이 즐겨 찾으셨다는 천불산 청량사. 비경속의 그림 같은 대웅전에 들어서자 석조여래좌불을 마주하고 또 한 번 놀랐다. 웅장하고 장엄함은 말할 것도 없고 해인사보다 먼저 창건되었다니 천년하고도 수백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화강암의 불신과 광배와 좌대가 이렇게 완벽하고 완전한 모습으로 보존되어 왔다는 것이 너무도 경이롭고 한없이 감사할 뿐이다. 당초 노천의 암반위에 조성된 본래의 상태에서 대웅전을 덧씌워 지었는지 기단석과 하대석은 마루청 아래에 있고 사면에 팔부신상이 조각된 중대석은 목조 불단 아래로 봐야 했다. 크고도 날렵한 연꽃잎 한 장에다 정교하게 문양을 양각한 광배하며 석굴암의 석불과도 너무도 흡사한 불신은 균형의 조화와 생동감이 어우러져 금방이라도 결가부좌를 풀고 일어설 것 같은데 오목하고 도드라짐이 너무나 섬세하여 가느다란 숨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나무아미타불!

/윤위식

청량사 가는 길

청량사 가는 길

 
경남일보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