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에 농사의 역사
누에 농사의 역사
  • 경남일보
  • 승인 2012.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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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이야기]김태성 박사
양잠은 먼 옛날부터 인간의 기본적 욕구인 의식주 중에서 삼베, 모시와 함께 의생활을 향유하기 위하여 발달해 온 산업이다. 양잠의 시초는 고서의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2550년 경에 중국의 삼황오제때 황제의 부인인 서릉씨에 의하여 처음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최근에 발표된 자료에 의하면 6~7000 여년 전인 신석기시대라는 설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단군조선시대 때에 양잠을 장려했다는 기록이 있어 우리민족의 양잠산업 또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양잠을 정책적으로 권장하기 시작한 시기는 삼국시대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기 고대국가 체제를 정비하여 국가 형태를 띠게 된 4세기 초부터 7세기 중엽까지이며 이들 삼국은 중국뿐만 아니라 북방의 유목민이나 남방의 일본과도 외교관계를 맺음으로써 자국의 문물을 전파시켰다. 양잠도 이러한 역학관계에 따라 전파되었다.

고려시대에 와서 국가의 조직과 백성의 생활이 더욱 분화되고 진보됨에 따라 비단의 수요가 증가하였다. 이러한 수요의 충족을 위한 시책으로 양잠생산기술을 보급하기 위해 인종 5년(1127)에 중국 송 초기 손광헌(960-970)이 편찬한 잠서를 임경화가 잠서주해를 내어 누에치는 법을 발전시켰다.

고려말까지는 조잡한 기술의 양잠이 행해지고 있었으나 조선이 건국되면서 국가에서 강력한 권잠정책을 시행, 양잠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또한 잠서의 간행으로 양잠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조선후기에는 면직업과 함께 근대 자본주의가 싹트게 되었다.

1890년대에서 1910년까지 청나라의 견직물은 조선에 수출하는 주요 품목이 되고 수입량이 늘어남에 따라 조선 정부는 새로운 직조기계를 발명하고 견직물 생산공장 건립하는 등 섬유공업 분야가 공장식 산업체제로 전환하게 된다. 1910년 한일합방과 동시에 조선총독부 관제개편에 따라 같은 해에 용산, 평양, 목포, 대구 등지에 동 지장을 설치하여 종자, 종묘의 육성과 보급을 하게 되었다. 광복후 혼란기가 계속 있었으나 이승만정권의 잠사분야에 재정지원을 함에 따라 광복에서 1950년대에 증산계획이 많이 수립되고 추진되었다.

고도 산업사회로 진입한 우리나라는 1차 산업은 그 비중이 점점 낮아지면서 잠사업 또한 해를 거듭할수록 양잠농가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한편 1989년 10월 개발도상국으로 인정되었던 수입제한 근거 규정인 GATT BOP를 졸업하면서 1997년까지 단계적으로 수입자유화가 됨에 따라 수입이 1997년까지 완전히 개방되었다. 농산물 수입개방이 시작되면서 농업은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되었고 문민정부 출범시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현재에는 지금까지의 잠업연구에 원원종 생산업무가 추가되고 연구방향 또한 천연섬유 소재에서 동충하초, 뽕잎차, 뽕잎 powder를 이용한 식품산업과 화장품 산업에 중요한 소재로 이용되고 있으며, 향후 인공고막 생산, 천연 항생제 생산 등 의료산업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전망한다.

김태성박사/경상남도농업기술원 농업연구관

김태성사진
김태성 경남농업기술원 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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