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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운드 명조련사' 불리는 도민구단 선장<경남축구열전> 경남FC 최진한 감독(上)
임명진  |  sunpower@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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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12.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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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FC는 올 시즌 K리그에 풍성한 화제를 쏟아냈다. K리그 사상 최초로 도입된 스플릿 시스템의 시행으로 K리그의 순위경쟁은 어느 때보다 치열했고, 경남FC는 시즌 개막 전만 해도 유력 강등후보 1순위로 꼽혔다.

이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최진한(51) 감독이 이끄는 경남은 시도민 구단 가운데 유일하게 상위리그에 진출했을 뿐만 아니라 FA컵 결승무대까지 진출해 AFC(아시아축구연맹)챔피언스리그 진출을 노리는 위치까지 올라섰다.

비록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지만 경남이 올 시즌 걸어온 행보는 단연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런 경남에는 최진한 감독이 있었다.

경남축구열전 세 번째 주인공은 재정난 속에도 팀을 상위리그 진출, FA컵 결승전까지 올려 놓은 최진한 감독이 그 주인공이다. 찬 바람이 매섭게 부는 날, 함안의 경남FC 클럽하우스에서 그를 만났다.

◇최고의 선수 조련사

2012년 10월20일 FA컵 결승전이 열린 포항 스틸야드 경기장은 희비가 엇갈렸다. 이긴 쪽은 포항이고, 아쉬움의 탄성을 쏟아낸 쪽은 원정팀인 경남FC 였다.

경남FC는 이날 연장종료 1분 여를 남기고 통한의 결승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경기는 그대로 끝이 났다. 경기가 끝난 그라운드에서 최 감독은 선수, 서포터즈와 함께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우리 선수들이 정말 열심히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었는데 너무나 아쉬운 경기였습니다. 찬스도 우리가 더 많았고 승부차기는 충분히 자신이 있었어요. 비록 우승은 하지 못했지만 우승 이상의 가치를 우리 선수들은 올 시즌에 해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결승전 장면을 회상하는 최 감독의 말에는 아직도 진한 아쉬움이 잔뜩 묻어났다. 경남FC는 올 시즌 그야말로 힘든 여정을 걸어왔다. 메인스폰서인 STX의 후원금 축소로 선수단 운영에 큰 어려움을 겪었고 구단주와 대표이사마저 중도 하차했다.

가득이나 어려운 도민구단이 경남FC는 선장도 없이 험난한 파고를 넘어야 했다.

최 감독은 흔들리는 선수단의 동요를 막고 선수들에게 동기부여를 심어 주는 등 뛰어난 관리능력을 보여줬다. 그 결과는 성적으로 드러났다. 최진한 감독은 올 시즌을 앞두고 스플릿 시스템 상위리그 진출과 FA컵 결승 진출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내 걸었다.

올 시즌 경남FC는 시도민 구단 가운데 유일하게 상위리그에 진출했고, FA컵 결승전까지 올라 당초 목표로 삼았던 모든 것을 이뤄냈다.

최진한을 아는 이들에게 그는 최고의 선수 조련사로 통한다. 그가 맡은 팀은 어김없이 우승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맛보았다. FC서울 2군, 서울 동북고, 관동대 등 그가 거쳐간 팀은 늘 정상권의 팀으로 성장했다.

특히 젊은 선수들의 재능을 발휘해 그 능력을 끌어올리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경남FC를 맡고나서 윤빛가람, 서상민 등 주전들이 대거 빠진 가운데 일궈낸 성과를 보면 그에 대한 평가가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하고 있다.

◇K리그 MVP 출신…공격형 미드필더 계보

진주에서 태어나 자란 최진한은 진주 중안초, 진주중, 진주고, 명지대를 거쳐 K리그 럭키금성과 유공에서 프로선수로 활약했다. 진주고 시절에는 전국대회에서 우수상을 거푸 수상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현역시절 K리그를 대표하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명성을 떨쳤는데, 1990년은 그의 최고의 해로 기억된다.

그 해 K리그 136경기에 출전해 무려 21골을 뽑아내며 팀의 리그 우승과 함께 K리그 최우수 선수상(MVP)을 수상했다. 숱한 골잡이 속에서 미드필더 출신의 최진한의 활약이 그만큼 돋보였기 때문이다.

1993년 현역에서 은퇴하기까지 200경기가 넘는 시합에 출전해 35골, 16도움을 기록했다. 리그 우승 2회, 준우승 2회 등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1984년 부터 1988년까지 올림픽, 월드컵 국가대표 선수로 활약했고 은퇴 이후 그는 올림픽 대표팀 코치를 거쳐 2002년에는 한일월드컵 대표팀 트레이너를 맡아 히딩크 감독을 보좌하며 한국축구의 영광의 순간을 함께 했다.

◇3명의 숨은 조력자…축구사랑은 부전자전

축구인 최진한이 있기까지는 3명의 숨은 조력자를 빼놓을 수가 없다. 첫 번째 조력자는 다름아닌 그의 부친 고 최한주씨다.

그는 “다른 축구인에 비하면 사실 축구를 좀 늦게 시작했다. 진주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정식으로 축구부에 들어갔으니 초등학교부터 축구를 배운 선수들에 비하면 다소 늦은 편이다”고 했다.

하지만 최진한은 초등학교부터 조기축구회를 섭렵한 범상치 않은 전력을 가지고 있다. 최진한은 초등학교 시절 학교 육상 대표 선수로 뛰었다.

그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새벽에 자는 저를 깨워서 자전거 뒤에 태우시곤 조기축구회를 데리고 다녀셨는데, 저도 지금 자식을 키우고 있지만, 그 때 느꼈던 아버지의 등이 얼마나 따듯했는지 모른다”며 부친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전했다.

부친 최한주씨는 아들의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만사 제쳐두고 경기장을 찾았다. 이런 부친의 지극정성에 최진한의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그는 “중학교 시절만 해도 평범한 선수였던 제가 고등학교부터 전국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으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데, 축구선수가 훈련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는 매일 같은 아버지의 가르침이 없었더라면 축구선수 최진한도 없었다”며 “자식을 키워보니 아버지가 저에게 얼마나 무한 사랑을 베풀었는지를 지금에서야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최진한은 진주고를 졸업하고 명지대로 진학했다. 연세대, 경희대 등에서 제의가 있었지만 ‘용 꼬리 보다는 뱀의 머리가 되라’는 아버지의 조언에 두말하지 않고 명지대를 택했다.

“사실 그 때는 무슨 뜻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그런데 아버님의 말씀이 어린 저에게도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거에요. 결과적으로 아버님의 말씀이 옳았구요.”

명지대로 진학한 최진한은 대학3학년 무렵 국가대표 2진을 거쳐 4학년에는 올림픽, 월드컵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됐다. 대통령배 전국대회 최우수선수상, 88올림픽 대표팀 주장까지 하며 각 프로팀의 영입 1순위로 주목을 받았다.

그는 “박지성이라는 걸출한 후배가 나오기 전까지 제가 명지대를 대표하는 축구선수 였는데, 지성이가 나오면서 한순간에 묻혔다”며 웃음을 터트렸다.

“박지성이는 수원공고 재학 시절 부터 알고 있었어요. 당시만 해도 지성이가 잘하는 선수가 아니었고 그저 열심히 하는 선수였어요. 제가 관동대 감독을 할 때 지성이를 데려 오려고 했는데 잘 안됐어요. 그때 지성이는 몸이 왜소하고 빠른 선수는 아니었기 때문에 연세대나 고려대 스카웃 대상은 아니었어요. 명지대 가서 그렇게 잘할 줄은 아무도 몰랐던 거죠.”

84년 럭키금성(현 FC서울)에 입단한 최진한은 꾸준히 경기 출장 시간을 늘려 나갔다. 당시에 대표팀과 소속팀을 오가는 생활을 2년 넘게 반복하면서 적응이 쉽지 않았지만 꾸준히 경기출장 시간을 늘려나갔다.

88년도에는 K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고 90년 K리그에서 소속팀을 우승으로 이끄며 리그 MVP를 수상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럭키금성에서 6년간 뛰다가 그는 유공으로 이적했다. 이적 첫해 그는 이적생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활약을 펼치며 녹슬지 않은 기량을 과시했다.

그리고 93년 그는 “1,2년은 충분히 더 뛸 수 있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그는 “정상에 있을 때 현역에서 물러나겠다”며 전격 은퇴를 선언했다.(못다한 이야기는 한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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