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수용소
고래수용소
  • 경남일보
  • 승인 2013.0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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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형란 (경상대사대부설고 교사, 시인)
‘당신이 가진 최고의, 그리고 최후의 자유는 바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 -빅터 플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나는 박수를 보내지 않았다. 그들에게 1분 간격으로 주어지는 생선의 가시가 나의 목에 걸렸고 물결처럼 누운 지느러미의 빗금만큼 가슴에 생채기가 났다. 그들이 첨벙댈 때마다 튀는 물거품은 전날 내린 진눈깨비만큼 쓸쓸했다. 그러나 좌석은 빈틈이 없었고 관객은 이중·삼중으로 서 있었다. 그들의 입에 죽은 생선 한 마리가 들어가자 거대한 몸을 공중으로 찔끔 띄워 올리는 동작에 내 앞에 선 키 작은 아이는 환호했다. 아이의 아버지는 내 뒤에 서 있었다. 본의 아니게 낀 배치로 나는 조련사처럼 아이의 모습을 시종일관 살펴야 했다.

앞머리가 둥글고 독특한 부리모양의 주둥이를 지닌 흰 고래 벨루가 삼남매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박 4일의 여정을 거쳐 우리나라에 입국했다. 그래서 여수엑스포의 인기 있는 코너의 주인공이 되었다. 꽁지머리를 한 아쿠아장의 흰 고래 담당자는 마이크를 손에 쥐고 그들 삼남매의 도전 의지와 재능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관객은 관객으로서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마음을 내주었다.지도에서나 보았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곳까지 험난한 뱃길을 뚫고 그들이 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운 가족이 있을까. 성공하자며 친구가 달콤하게 유혹한 꾐에 넘어갔을까. 도저히 결혼할 수 없는 애인과 너 없이 못 산다며 야반도주를 했을까. 아니면 그들의 몸 색깔같은 백지로 만드는 치매에 걸렸을까. 그나저나 성공도 연정도 결국 한때의 허탈한 게임이라는 것을 조용히 깨닫는 날, 그들은 시멘트 바닥 대신 스스럼없이 활보하던 고향의 바다를 헤엄쳐 갈 수 있을까.

할머니는 치매로 기억을 잃어버렸었다. 유년의 나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셨던 할머니는 손녀인 나를 볼 때마다 ‘네가 누구냐’고 하셨다. 나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당신의 고향에서 함께했던 추억에 대해 나는 이야기했다.할머니는 나만큼이나 선명한 옛날을 떠올리며 마냥 좋아하셨고, 그곳으로 당신을 데려 달라고 하셨다. 그리고 할머니는 낡은 고무신을 끌어안고 주무셨다. 신발이 없으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만이 할머니 삶의 유일한 희망 같았다. 사후에야 할머니는 고향의 땅에 비로소 가셨다.

짧은 공연이 끝났다. 등 뒤의 아이 아버지는 흰 고래에게 여전히 눈을 떼지 못하는 아이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나는 조심스럽게 길을 터서 아이를 아버지의 품 안에 인계했고 아이의 등을 토닥거렸다. 추위 탓인지 코끝이 시리고 침침한 눈이 더 흐리다. 조국 교수의 묵언안거 선언이 화제인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3박 4일 동안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망망대해의 현기증 나는 등대지기나 되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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