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발효
시간 발효
  • 경남일보
  • 승인 2013.0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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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형란 (경상사대부설고 교사, 시인)
시간에 소금 간을 맞춰 항아리에 넣어두면 한겨울에 살얼음 둥둥 뜬 동치미가 될까, 그윽한 빛깔의 간장이 될까, 그윽하지 않은 빛깔의 된장이 될까, 혹은 한 해 지나고 두 해 지나 저 혼자 흐물거리며 스며들다가 그러기를 또 몇 해 기다리다 보면 곰소 바닷가 짭조름한 젓갈이 되어 있을까. 아니야, 세상살이에 지쳐서 소금과는 결별을 하고 다른 무늬를 만나 장소를 옮긴 후 얼큰히 취하고 싶은 술이 되어 있을지 모른다.

곰팡이는 하늘과 땅 사이에 언제나 있고 어느 곳에나 있다. 그는 영리하고 예민하며 공동체의 삶을 지향하고 기다림이 무엇인지를 아는 이에게 다가간다. 만약 그의 숨겨진 놀라운 힘을 모르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그는 자신도 버리고 상대도 버린다. 우리는 그것을 부패라고 부른다. 그러나 예측할 수 없는 잠재력과 가능성에 손을 내밀어 그와 조화를 이루면 너도 살고 나도 산다. 우리는 그것을 ‘발효’라고 부른다.

유년에 어머니께서는 간장을 담그실 때 먼저 달력을 보셨다. 1년 음식의 맛을 결정하는 장이라 아주 중요한 의미를 두셨고 좋은 날을 정성껏 좇아 달력에 미리 붉게 동그라미를 해 두셨다. 하루종일 장 담그기가 끝나면 나뭇가지로 메주를 누르고 그 위에 붉은 고추 세 개와 곶감 세 개 그리고 숯 세 덩어리를 얹어서 항아리의 뚜껑을 닫으셨다. 왜 그들을 얹느냐는 질문에 어머니는 붉은 고추는 장맛을 개운하게 하고 잡귀를 물러가게 하기 위해서이고 곶감은 장맛이 달게 해 달라는 기원이며 숯은 냄새와 불순물을 없애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항아리 안에서 겨우내 잘 띄운 메주와 소금물 및 나머지 재료들이 더불어 나누고 보내는 시간 동안 어머니는 자주 살피고 또 기다리셨다. 돌려 말하면 그 안에도 공동체의 윤리가 존재했고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환경이 필요했다.

시간도 하늘과 땅 사이 어느 곳에나 있고 누구에게나 있다. 그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서 감정에 휩쓸리는 법이 없다. 나에게 주는 하루치의 양과 너에게 가는 하루치의 양을 저울에 달았을 때 한 치의 오차도 없다. 만약 게으르거나 에고이즘에 길들여져 약삭 빠르거나 변덕스럽게 시간을 사용한다면 돌아오는 성과물도 없을 것이고, 나와 세상에 존재하는 대상들과의 관계도 허접해지거나 허허로운 벌판처럼 텅 비게 된다.

새해에 나는 시간을 발효시켜 보고자 한다. 열정을 가지고 틈으로 들어가 진솔한 시간의 길을 내어 서로 삼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길에서 대상들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고 지극한 시간을 오래도록 나눈다면 깊고 무르익은 맛을 내는 묵은지의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그래서 발효된 삶이 현실에도 서서히 내려앉았으면 좋겠다. 메주가 햇볕과 바람을 맞으며 항아리 안에서 가라앉는 동안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아우라를 갖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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