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사과 산란(産卵)
풋사과 산란(産卵)
  • 경남일보
  • 승인 2013.01.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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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형란 (경상대사대부설고 교사, 시인)
‘비록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스피노자)’

사과의 씨앗이 자라서 홍옥이 될는지 부사가 될는지 누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숨 막히게 붉은 빛깔을 가진 근육질 사과가 되든, 시원한 과즙이 입가를 타고 흐르는 아삭한 사과가 되든 무엇인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몸 떨리게 설레고 가슴 벅차는 일이다. 물론 과학적으로 예측 가능한 풋사과의 미래는 씨앗의 DNA에 달려 있다. 그리고 과수원 주인의 노력과 환경에 의해 풋사과의 실존은 더 채워질 것이다.

유치원의 한 아이에게 “지금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또래의 아이들처럼 “낮잠 한 번 제대로 자보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것을 매체를 통해 본 적이 있다. 방과 후에 피아노와 태권도, 발레와 영어학원을 전전긍긍해야 하고 저녁을 먹은 후에는 무슨 놀이선생님이 천진무구한 그 아이의 집 거실로 방문한다고 했다. 달콤한 낮잠을 희생하면서 이렇게 용을 쓰고 유난을 떠는 아이가 부모에게 가장 자주 듣는 말은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너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그 ‘사랑’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과수원의 주인은 처음에는 사랑스러운 풋사과가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성장해 주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호두보다 큰 대추를 보고난 후 마음이 달라졌다. 꿀처럼 달콤하고 배처럼 시원하며 껍질째 먹을 수 있는 품질 좋은 친환경 사과에다가 샛노란 귤처럼 새콤달콤한 사과를 만들고 싶어졌다. 계획적이고 적극적으로 접을 붙이고 때에 맞춰 비료를 준비하고 껍질을 살리기 위해 석회분도 준비했다. 그리고 과수원에서 닭 울음소리가 들렸고 여기저기 달걀이 굴러다녔다. 그렇다. 주인의 자존심 강한 사랑이 커져갈수록 풋사과의 하루하루는 바람에 따라 쉼 없이 밀려다니는, 떨어진 사과 잎사귀처럼 불안했다. 이러다 보면 풋사과로 하여금 알도 낳으라는 생뚱맞은 삶을 요구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철학자 중 스피노자를 가장 좋아한다. 그는 하이델베르크 철학교수로 초빙받았으나 거절하고 평생을 렌즈 세공인으로 청빈하게 살았다. 이유는 공공단체와의 결연이 학문연구와 사상의 자유를 해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대인 교회로부터 무신론자로 낙인 찍혀 파문당했지만 신에 대한 지적 사랑으로 신과 합일하는 범신론을 주장한 점과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극복하고 일원론을 주장한 점들이 사상 외에도 마음에 와 닿는다.

나도 마음 가는데 몸 가고 싶은 사람이다. 아마 스피노자는 다시 태어나도 여전히 환상적인 자기 동일성을 지닌 철학자가 될 것 같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시를 쓰고 싶다. 그나저나 스피노자가 심으려고 한 사과나무의 사과들이 무슨 피곤한 알리바이들과 접속하는지 요즈음 아름답고도 무겁게 달려 있어서 걱정스럽다.

/진형란·경상사대부설고 교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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