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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넣는 골키퍼' 스스로 역사가 되다<경남축구열전> '살아있는 전설' 김병지(上)
임명진  |  sunpower@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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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1.3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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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불혹을 훌쩍 넘긴 나이다. 한국 나이로 마흔 넷의 나이로 아직도 현역 프로축구 선수로 활약하고 있는 그를 ‘기록의 사나이’, ‘살아 있는 전설’ 이라고 부른다.

‘꽁지머리’를 휘날리며 K리그의 한 시대를 풍미했고, 지금도 그의 골키퍼 인생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의 파란만장한 축구인생을 들어보았다./편집자 주

◇K리그 최초 600경기 출장 대기록 달성

김병지, 그의 이름 석자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유명인사의 반열에 들었으니, 이만하면 축구 선수로서 ‘성공한 축구인생’이 아닐까.

그의 명성은 2012년 10월7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K리그 경남FC와 FC서울의 경기에서 K리그 최초의 600경기 출장 대기록을 수립하며 더욱 빛이 났다.

먼저 대기록 당시의 소감부터 들어보자.

“사실 기록에 대한 것들은 400경기를 넘어서 부터 꿈을 키워 왔습니다. K리그의 역사에 발자취를 남기는 기록이고, 그때부터 기록과 함께 축구인생에 노력에 대한 결과를 얻는 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축구선수로서의 목표에 대한 성취감이라고 할까요. 자부심이 기록에 대한 열정을 계속 키워가는 밑거름으로 작용했습니다”

400경기를 넘어서부터 기록을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축구선수로서 많은 분들이 좋은 모습을 이해해 주시고, 자기관리와 경기력을 칭찬해 주실 때가 가장 기분이 좋았어요. 그동안의 축구인생에 대한 보답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니까요”

실제 그가 달성한 600경기 의미는 프로축구가 태동한 지 33년을 오면서 수립한 최초의 기록이고, 출장수가 최고로 많은 기록이다. 이 기록을 산술적으로 이뤄내려면 21년동안 k리그의 출전규정 90% 이상의 경기를 출전해야만 이뤄질 수 있다. 그만큼 숫자는 600이지만 실제로 이 기록을 달성하려면 많은 노력과 관리가 있어야 가능한 숫자다.

◇공격하는 골키퍼로 명성 떨쳐

김병지는 공격하는 골키퍼로 명성을 떨쳤다. 1990년대 중·후반 당시 세계축구사는 유독 공격하는 성향을 가진 출중한 골키퍼들이 이름을 날렸다.

칠라베르트, 캄포스, 바르테즈 등 한 국가를 대표하는 골키퍼들이 모두 공격성향을 내보이며 세계 축구팬들의 이목을 끌던 시절이었다.

김병지는 아시아권에서 공격하는 골키퍼로 강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계기가 됐던 것이 1998년 10월에 있었던 울산과 포항의 플레이오프 2차전 경기다.

당시 포항에 1차전을 내준 울산은 2차전에서도 경기종료 시각이 임박할 때까지 1대1의 균형을 깨지 못했다. 1무 1패로 챔피언 결정전 진출권을 포항에 넘겨줘야 할 판이었다.

후반 46분 찾아온 마지막 프리킥 찬스. 김병지까지 골문을 버리고 포항의 문전에 포진했다. 김현석의 프리킥은 때마침 김병지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고, 키 185㎝의 장신 김병지는 기다렸다는 듯 혼신을 다해 뛰어올랐다. 국내 프로축구 사상 첫 ‘골 넣는 골키퍼’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부연설명을 하자면 김병지는 1,2차전 합계 무승부에서 승부차기로 들어가 두 개를 선방하면서 그 날 최고의 히어로로 부상하며 축구팬들의 뇌리속에 공격하는 골키퍼라는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제 생애 최고의 경기를 꼽으라면 단연 그 경기죠. 아직도 그 경기가 뚜렷히 기억이 납니다. 도움을 주기 위해 올라갔던게 골로 연결됐고, 어떻게 보면 그날의 헤딩골이 그 시대의 공격하는 골키퍼로서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아주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된 거죠”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그의 공격 본능은 2002년에는 빛을 발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지나친 공격 본능이 화근이 됐다.

◇뜨거웠던 2002년 한일월드컵, 하지만 김병지는…

김병지는 명장 히딩크 감독의 부임 후 2001년 홍콩에서 열린 칼스버그컵 파라과이전에서 골문을 버리고 하프라인까지 올라가는 지나친 적극성을 보이다가 눈 밖에 나고 말았다.

그 전까지 대표팀 부동의 골키퍼는 단연 김병지가 손꼽혔다. 생애 첫 국가대표에 뽑힌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히딩크가 이끄는 네덜란드에 0대5라는 대패를 당했지만 오히려 김병지의 신들린 방어가 화제가 될 정도였다.

네덜란드의 슈팅수만 27개. “골 막는데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는 김병지의 표현 처럼 히딩크 감독도 김병지 때문에 더 이상의 득점을 올리지 못했다고 말 할 정도로 김병지의 활약상은 돋보였다. 히딩크 감독도 눈여겨 본 김병지 였기에 2002년 대표팀 수문장도 그의 몫이 될 거라는 데 의문은 없는 듯 했다.

하지만 2002년 수문장 자리는 라이벌 이운재의 차지였다. 김병지는 한일월드컵에서 단 한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다.

“하프라인까지 올라간 것은 K리그가 아닌 대표팀에서 처음 이었어요. 감독의 생각도 충분히 공감은 가요. 그게 월드컵까지 전혀 영향이 없었던 거도 아니었고…”

잠시 말문을 가다듬는 김병지. “히딩크 감독은 안정적인 플레이 자체를 원했던 거였어요. 그 일이 있고나서도 당시 여론도 경기전날까지 저를 선발출전이 유력하다고 보도했고, 저도 내심 기대를 했었어요. K리그에서 워낙 좋은 활약을 했으니까요”

그때의 아픔은 10년이란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남아 있었다.

“3·4위전인 터키전에서 뛰게 해 줬더라면 서로 이해의 폭이 있을만도 했는데, 당시 국민들도 그동안 뛰지 못했던 선수들이 출장해도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잖아요. 그런게 많이 섭섭하죠. 히딩크 감독이 저에 대한 생각을 끝까지 안고 갔다고 생각할 수 밖에요”

그리고 김병지는 국가대표에서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K리그에서 김병지는 제2의 전성기를 활짝 열었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개인적으로 한일월드컵이 제가 지금까지 운동을 할수 있었던 이유가 된 것 같아요.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지혜로움도 배웠고, 자기관리라든지 깨우친게 많았어요. 지나간 일들에 대한 아쉬움은 가지고 있지만 좋지 못한 것과 그로 인해 배우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깨친 거죠”

김병지는 한일월드컵에서 단 한경기도 출장하지 못했지만 후배들을 격려하며 선배로서의 제 역할을 묵묵히 해냈다. 그때의 아픔이 그의 말대로 제2의 김병지를 탄생하게 한 밑바탕이 됐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못다한 이야기는 하편에서)



김병지는

▲밀양 출생(1970년생)

▲밀양초-밀양중-알로이시오고

▲울산 현대-포항 스틸러스-FC서울-경남FC-전남 드래곤즈

▲국가대표 경력 96년 AFC아시안컵 대표-1998년 월드컵 대표-2002 월드컵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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