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들의 나라사랑을 만난다
선조들의 나라사랑을 만난다
  • 경남일보
  • 승인 2013.02.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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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의 혼이 서린 경남의 사적지
한산도 제승당
한산동 제승당
 
경남에서 계사년은 매우 의미가 깊은 해이다. 임진왜란 발발한 1592년 임진년에는 국가가 백척간두의 존폐 위기를 맞았지만, 그 보다도 더 큰 위기는 그 다음해인 1593년 계사년이었다. 420년 전 계사년에는 전라도를 제외한 전 국토가 왜군에게 점령당해 망하기 직전이었다. 경남 역시 왜군에게 유린당하고 있던 계사년에는 진주성에서 6만 민·관·군이 산화했으며, 곳곳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왜군과 싸우던 많은 의병들이 귀중한 목숨을 잃었다. 경남에는 420년 전 나라를 구한 선조들의 충절의 계사년 혼이 곳곳에 서려 있다. 이번에 맞는 설에 자녀들과 함께 나라를 구한 선조들의 혼이 살아있는 사적지를 찾아 충절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도 설을 보람 있게 보내는 여행이 될 것 같다./편집자 주

경남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가장 치열했던 전투를 치렀던 격전지이다. 특히 임진왜란 사상 가장 많은 목숨이 사라진 진주성 2차 전투를 비롯해 최초 의병 발상지 의령, 나라를 구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승첩지 등 많은 사적지가 산재해 있다.

◇진주성(사적 제118호)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일명 촉석성(矗石城)이라고도 한다. 1592년 10월 임진왜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1554∼1592)이 3800명의 군사로서 3만 여명의 왜군을 물리쳐 진주대첩을 이룬 승전지이다. 진주대첩은 한산대첩과 행주대첩과 함께 임란 3대첩(壬亂三大捷) 중 하나이다.

그러나 다음 해인 계사년(1593) 6월에는 전년의 패배를 설욕코자 10만 여명이 또 침략하여 끝내 7만 민·관·군이 최후까지 항쟁했으나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 모두가 장렬히 순절하는 비운을 겪은 패전지이기도 하다. 이때 논개(論介)는 의암 바위에서 적장을 안고 남강(南江)에 투신하였다.

삼국시대에는 거열성, 통일신라시대에는 만흥산성, 고려시대에는 촉석성, 조선시대 이래로는 진주성 또는 진양성으로 불리었다. 고려 말 공민왕(恭愍王) 때 7차례 중수되고 왜구 방비의 기지로 사용되었다. 이후 1605년(선조 38)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이 진(鎭)을 성내로 옮기고 성이 너무 넓어 수비가 곤란하다 하여 내성을 구축하였다. 그뒤 병사 김태허(金太虛)가 1607년 포루(砲樓) 12개를 증축하였고, 1618년(광해군 10) 병사 남이흥(南以興)이 성 수축을 했다. 지금의 진주성은 대략 이때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성의 둘레 1.7km, 외성의 둘레 약 4km이다. 성내(城內)에는 촉석루·창열사·의기사·북장대·서장대·영남포정사·국립진주박물관·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촉석문·공북문·호국사 등이 있다.
 
제승당 전체 모습
제승당 (산 위에서 촬영)
 
◇통영 제승당(사적 제113호)

제승당은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 875번지에 위치한 사적 제113호이다. 경내 면적은 60만871㎡이며, 건물은 28동, 건평 1,602㎡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순신은 한산대첩을 통해 바다의 제해권을 구축한 후 제승당을 짓고, 1593년부터 1597년 정유재란까지 4년간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으로 삼아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국난을 극복하는데 기여한 유서깊은 사적지이다. 1597년에 폐진 되었다가 142년 후인 1739년 영조 15년에 통제사 조경이 중건하고, 유허비를 세웠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진(陣)을 친 이후 늘 이 집에 기거하면서 휘하 참모들과 작전계획을 협의하였던 곳이며 집무실이기도 하다.

이곳은 원래는 운주당(運籌堂) 터이다. 운주당이란 이순신이 가는 곳마다 기거하던 곳을 편의상 부르고 있는 곳인데, 1740년(영조 16)에 통제사 조경(趙儆)이 이 옛터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 제승당이라 이름한 데서 비롯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30년대에 중수한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경내에는 유허비ㆍ기념비ㆍ귀선각(龜船閣)ㆍ한산정(閑山亭)ㆍ대첩문(大捷門) 등이 있으며, 1959년 정부가 사적 제113호로 지정했으며, 1976년 성역화작업으로 정비되었다.

제승당 내부에는 영당과 충무공의 해전(노량해전, 사천해전, 한산대첩)과 진중생활도를 그린 다섯 폭의 해전도와 현자총통, 지자총통, 작은 거북선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의령 충익사_의병탑_전경-3
의령 충익사(의병탑) 전경.


◇의령 충익사

의령군 의령읍 중동에 있는 사당.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한 곽재우(1552~1617)와 그 휘하 장수17명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972년 이래 해마다 곽재우 추모행사를 거행하였으며 1978년 12월 현재의 위치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면적은 2만3600㎡이고, 충익사당, 기념관, 충의각, 내삼문, 외삼문 등 9동의 건물이 있다. 이 중 사당에는 곽재우를 비롯한 여러 장수들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기념관에는 붉은 옷을 입고 백마를 탄 곽재우 장군이 군사들을 지휘하는 기마도를 비롯해 의병창의도·정암진승전도·화왕산성대치도 등 각종 전투 장면을 그린 5폭의 대형 전적도와 유적지 사진 등이 걸려 있다. 또 보물 제671호로 지정된 곽망우당유물(郭忘憂堂遺物) 6점 즉 임진왜란 때 곽재우가 사용했던 장검·말갖춤(마구)과 평소 사용했던 포도연·사자철인·화초문백자팔각대접·갓끈을 볼 수 있다. 그밖에 망우당문집(창의록 및 목판)과 친필자작시·유지 등의 문서자료, 화살촉·마름쇠·깃대촉 등 전쟁 때 쓰였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공포와 장식이 화려한 충의각에는 곽재우와 17명의 장수들에게 사후에 내린 관직명이 보관되어 있다. 이밖에 도기념물 제 83호인 모과나무가 자리잡고 있으며 높이 27m에 이르는 충혼탑이 있다.

곽재우는 의령군 유곡면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다. 휘하에 17명의 장수와 수천 의병을 거느렸으며 정암진, 기강, 현풍, 창령, 화왕산성, 진주성 등의 전투에서 왜군을 무찔러 이들의 전라도 진격을 막았다. 전란 뒤에는 진주 목사, 경상좌도방어사, 함경도 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세상을 떠난 뒤에는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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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노량충렬사 전경


◇남해 충렬사(사적 제233호)

충렬사는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으나,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350에 소재하고 있는 충렬사는 그 의미가 다르다. 남해 충렬사는 임진왜란이 끝나던 해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충무공 이순신의 충의와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기 때문이다. 노량 충렬사라고도 한다. 면적 1만2088.55㎡. 안에는 사당 ·재실(齋室) ·비각(碑閣) 각 1동,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비(碑) 4기(基), 가분묘(假墳墓) 1기 등이 있다.

1598년(선조 31) 11월 19일 이순신이 노량 앞바다 전투에서 순국하자, 처음 이곳에 유해를 안치하였다가 충남 아산의 현충사(顯忠祠)로 이장하였고, 현재 이곳에는 봉분(封墳)뿐인 가분묘만 남아 있다. 이순신이 순국한 지 35년 뒤인 1633년(인조 11) 초사(草舍)와 비를 세워 치제추모(致祭追慕)하였고, 1658년(효종 9) 사당을 건립하고 비도 다시 세웠으며, 1662년(현종 3)에는 ‘충렬사(忠烈祠)’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이 사당은 1661년(현종 2)과 1899년(광무 5)에 중수하였는데, 비 하나에는 1661년 중수한 사유를 자세히 기록한 송시열(宋時烈)의 비문이 있다. 사당을 세운 당시에는 사당 옆에 호충암(護忠庵)이라는 암자가 있어 화방사(花芳寺)의 승려 10여 명과 승장(僧將) 1명이 교대로 수직하였다. 충렬사는 1973년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보수 ·정화되었다.

통영/허평세·남해/차정호·의령/박수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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