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설날"
그 시절 "설날"
  • 경남일보
  • 승인 2013.0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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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철 (한국폴리텍대학 교수)
설날 연휴가 지나갔다. 요즘이야 설날이라는 단어가 쉽게 사용되고 있지만, 불과 20~30년전에는 양력설은 신정, 지금 설날은 ‘구정 또는 민속의날’이라고 불렀다. 아픈 과거가 묻어 있는 용어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우리민족의 혼을 말살하고자 그들이 사용하던 양력 1월1일 신정(新正) 쇠기만을 강요했다. 정월초하루인 음력설은 구정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신정을 쇠면 친일매국, 구정을 쇠면 반일애국이라고 했고, 서민들은 두 번의 설을 쇨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정부는 신정만을 공식적인 휴무일로 지정했다. 음력설-구정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구정이 오늘의 설날처럼 대접을 받은 것은 1986년 ‘민속의날’이라는 명칭으로, 음력설의 의미를 일부 되찾았을때부터. 1988년까지 음력1일1일 하루만 공휴일이었다. 1989년에 지금과 같은 ‘설날’이 자리잡게 되었다.

설날의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낯설다’는 우리말과 같이 ‘새해에 대한 낯설음’과 ‘아직 익숙하지 않는 날’이란 뜻을 갖고 있다. 또 ‘선날’,‘장이 서다’라고 하듯이 시작이라는 뜻의 ‘선다’라는 말에서 ‘새해 새날이 시작되는 날’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두 글자를 이어 붙여 읽다보니 ‘선날’이 설날로 변했다는 것.

70~80년대 설날의 모습과 지금은 큰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그때 그 시절은 먹고살기 힘들어서 그런지 설날 선물로는 대부분 생필품이 주를 이뤘다. 근로자들을 위한 단체버스를 제공해주는 사업장들도 많았다. 오늘날은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겠지만, 불과 30여년전의 설날 모습이다. 이는 공장에 근무하던 여자근로자들에게 설날 선물꾸러미를 손에 쥐어주며 설을 쇠고 다시 돌아오길 간곡히 바라던 기업들의 풍경이다. 그 시절에 갖고 있던 우리들 애환이었다. 가끔 TV에서 보여주는 ‘대한뉘우스’ 속에서 그때 그 시절 설날은 기쁨과 슬픔이 함께 배어있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남행열차에 몸을 실은 귀성객들의 모습과 고속버스 차창가에 비친 얼굴에서 귀성의 기쁨을, 고향집 문을 나서며 늙으신 부모님과 다음 설날이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슬픈 이별을 하는 장면이 흑백 필름에 잔잔히 남아있다. 그때 그 시절 설날은 왜 그렇게 추웠는지…. 또 만남과 이별의 정이 더 깊이 사무치는지…. 지금 설날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대중교통이 발달하고 소득수준이 높아져서 그런지 언제든 쉽게 갈수 있는 고향이 돼서 그러한 건지….

그렇지만 그때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설날 떠나 보내는 이별의 슬픔은 똑 같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지금 전화를 들어 본다. 목소리라도 고향에 남겨두고 싶어서…. “뚜우~여보세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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