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어르신께 세배하러 다녔던 설날
동네 어르신께 세배하러 다녔던 설날
  • 경남일보
  • 승인 2013.0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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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점석 (창원YMCA 명예사무총장)
어릴 때의 일이 생각난다. 설이 되면 동네 친구들과 함께 동네 어르신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며칠 전부터 어느 분을 찾아뵐 것인지를 생각하느라고 마음이 바빳다. 하루 전날인 까치설날에는 지난해에 받았던 세뱃돈을 생각하면서 벌써부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설날에는 아침 일찍 일어난다. 그리고 설빔으로 마련한 새 옷이나 새 신발을 신는다는 것만 해도 기분이 좋다. 할머님과 어머님께서 정성껏 준비하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도 명절에 맛볼 수 있는 큰 즐거움이다.

제사를 드리지 않고 추모예배를 하는 지금까지도 탕국, 나물, 튀김, 강엿 등의 전통은 즐거운 기억을 되살리면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설날 아침에는 유달리 제사음식을 차리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린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배가 많이 고파서 더 길게 느낀 것 같다. 찌짐이나 튀김을 몰래 먹으려다가 꾸중을 듣기도 하였다. 어머님께서는 제사가 끝나면 곧바로 제사상에 차려진 갖가지 음식을 조금씩 잘라서 신문지 위에 진열하였다. 혹시나 빠트린 음식이 있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나서 대문 밖에 내놓았다. 우리는 이것을 까치밥이라고 불렀다. 이름처럼 진짜로 까치가 와서 먹느냐고 물어본 적도 있었다.

6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 거지가 많았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명절에는 더욱 외롭고 쓸쓸해지는 법이다. 그래서 집집마다 제사음식의 일부를 떼어서 대문 밖에 내어놓는 것이었다. 더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까치를 위한 배려일 수도 있고 조상과 함께 저승에서 오신 가족 없는 혼령일 수도 있으나 내가 어릴 때는 거지를 위한 음식이었다. 꽤 오래 기다려서야 비로소 아침식사를 할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집안 어르신께 세배를 하였다. 굳이 세배를 받지 않겠다는 큰어머님까지도 자리에 앉게 해서 절을 하였다. 왜냐하면 한 명이라도 더 있어야 수입이 느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싫다고 하면서도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우리는 절을 하고 나서 제자리에 꿇어 앉아 덕담과 세뱃돈을 기다렸다. 어르신께서는 많이 컸다, 올해에도 공부 잘하고 건강해라, 형제끼리 싸우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다. 세뱃돈은 현금으로 주신다. 대개 한복 조끼 주머니, 치마 속 주머니에서 끄집어 내시는데 신권이다. 며칠 전에 은행에 들러셔서 새 돈으로 바꾸어 놓으신 것이다. 깔깔이라고 불리던 새 돈을 받아들면 무진장 기분이 좋았다.

이제부터는 친척하고 만나서 놀거나 동네 어르신을 찾아뵙고 동네세배를 하는 순서였다. 대게는 친구 부모님을 찾아뵙거나 아버님·어머님의 친구분에게 먼저 간다. 가족이 없으신 할아버지·할머님을 찾아가기도 하였다. 한 집 한 집을 돌다보면 일행이 계속 늘어난다. 왜냐하면 친구 부모님께 세배 드리고 집을 나설 때에는 어김없이 그 친구도 우리와 동행하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나서는 받은 세뱃돈을 총괄 계산하면서 내년 설날에 다시 하자는 약속을 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같은 초등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이 동네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고, 부모님 친구분들 역시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찾아갈 수 있었다.

직장을 옮기면서 자주 이사를 하는 경우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동네 어르신 집을 찾아가면 모두가 반가이 맞이해 주셨다. 맛있는 과자와 과일도 주시고 작년에도 왔더니 또 왔네라고 하셨다. 새해 덕담을 하실 때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들으라고도 하시고 구체적으로 중학교 입학시험을 잘 준비해라, 자전거를 조심해서 타라고도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어르신께서는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계셨으며 지난해에 동네에서 자전거 타다가 넘어진 사실도 알고 계셨던 것이다. 공놀이 할 때는 유리창을 깨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꾸중을 들을 때에는 머리를 긁적이며 빨리 나오기도 하였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생각해 보면 설날에 동네 어르신들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나의 성장에 중요한 영양분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말하자면 동네가 아이를 키우는 셈이다. 살기 좋은 지역은 이웃이 있는 마을 공동체를 회복하는 데에서부터 찾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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