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육아
할머니의 육아
  • 경남일보
  • 승인 2013.0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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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순 (전 진주여성민우회 부설 성폭력상담소장)
동네 여자 목욕탕은 예나 지금이나 동네 아주머니들의 놀이터이다. 옛날, 조그만 동네의 빨래터가 하던 역할을 요즘은 목욕탕이 하는 것 같다. 여기저기서 안부를 묻고 서로의 건강도 챙기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소리가 시끌벅적하다. 탕 안에서 혹은 사우나실 안에서 이어지는 수다는 건망증 얘기에서부터 정치 이야기까지 그 주제가 광범위하다.

이런 목욕탕에 예전과 달라진 풍경이 보인다. 할머니들이 손녀 혹은 손자를 데리고 오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엄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경우만큼이나 할머니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모습이 눈에 많이 띈다. 홀로 온 할머니들의 입에서는 ‘얼른 씻고 가서 아이 봐야 한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이런 풍경은 맞벌이 부부인 자녀의 아이를 봐주는 할머니들이 많이 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몇 년 전부터 우리를 고민에 빠지게 한 사회문제 중 하나인 저출산 문제의 가장 큰 원인은 육아부담이다. 특히 일하는 여성들에게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아이를 맡길 곳을 찾는 것에서부터 아이를 맡기는 비용까지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영·유아 보육시설이 턱없이 모자라는 우리 사회에서,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곳을 찾기는 하늘의 별따기이고 맞벌이를 한다고 해도 그 비용부담 또한 만만치 않다. 그래서 결국은 가족 내 또 다른 여성, 즉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에게 육아를 부탁하게 된다.

아이의 할머니로서는 이제 겨우 육아부담 혹은 직장과 육아부담에서 벗어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나이에 자녀의 자녀를 돌봐야 하는 짐을 떠안게 된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아이 돌보기가 힘에 부치기는 하지만 자녀가 처한 상황을 보면 이 짐을 떠안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첫째자녀의 아이 키우기가 어느 정도 이뤄져 한숨을 돌릴까 하면 첫째자녀의 작은아이, 둘째자녀의 큰아이 등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는 경우도 있다. 늙은 나이에 자녀의 아이 돌보기에 허리가 휜다. 물론 할머니들은 손자·손녀가 사랑스러워서 아이 돌보기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고 한다. 손자·손녀를 바라보는 할머니들의 눈과 손자·손녀의 재롱을 자랑할 때의 표정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그분들의 마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여기에서 ‘사랑으로 자녀를 돌보는 모성’이라는 성 역할 고정관념이 이분들에게 늘그막의 육아부담을 씌우고 있다는 혐의를 발견하는 것은 나만의 과민함일까.

모성의 발로이든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녀에 대한 안쓰러움의 발로이든 이러한 할머니들의 육아부담 현상은 이제 육아가 젊은 엄마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복지에 대한 고민이 개별 대상집단을 넘어서서 사회·전체적으로 이뤄져야 하는 이유이다. 노인여성은 노인여성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다. 신체적·정신적으로 노화를 겪으면서 그리고 경제활동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이분들은 우리 사회가 돌봐야 할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처해지고 있다. 거기에 더해서 육아의 책임까지 떠맡기는 것은, 이 나이의 여성들에게 더 큰 어려움을 전가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언제까지 아이 돌보기, 더 나아가서 환자와 노인 돌보기를 개별 가족의 책임으로 돌려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할 때다. 앞으로의 사회는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더 늘어날 전망이고, 또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당연히 더 늘어나야 한다. 그런데 지금처럼 가족 내의 아이, 환자, 노인 돌보기를 가족 내 책임으로 묶어 둔다면 육아에 당면한 젊은 여성들은 젊은 여성들대로, 가족 내의 환자나 노인이 있는 여성들은 또 그들대로 그리고 직장에 다니는 자녀의 아이를 돌봐야 하는 노인여성은 노인여성대로 이러한 돌봄의 부담 때문에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이는 개인 여성에게 부담을 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생산력의 저하를 가져올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국가가 어떤 방식으로 유인을 한다 하더라도 출산율 제고 또한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아이 돌보기, 환자, 노인 돌보기 책임의 무게중심이 개별 가족에서 사회로 옮기는 작업이 시급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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