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잔 돌리기의 폭력성
술잔 돌리기의 폭력성
  • 경남일보
  • 승인 2013.0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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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운 (객원논설위원, 창원대 행정학과 교수)
꽤 오래전 어느 지방자치단체장이 주최한 저녁식사 모임에서의 일이었다. 회식 도중 그 단체장의 주도로 20여명의 참석자 전원이 하나의 맥주잔으로 ‘화합주‘라는 명분하에 술잔을 여러 바퀴 돌린 경험이 있었다. 한 사람 두 사람 거쳐 오면서 간혹 휴지, 물수건, 손을 이용한 세척을 거치며 전해오는 술잔의 모습을 바라보는 참석자들의 표정이 별로 행복하지 않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러한 집단 술잔 돌리기와 함께 마시던 술잔을 자연스럽게 상대방에게 건네주는 것이 한국적 술잔 돌리기 음주문화의 현주소이다.

요즘 와서는 술잔 돌리기가 많이 사라지긴 했으나 세대와 직업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고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와 같은 술잔 돌리기는 별 실체적 의미가 없이 엄청나게 큰 목소리로 외치는 “위하여” 합창구호와 함께 진지하고 재미있는 대화보다 모임의 외형을 중시하는 한국의 회식문화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회식 자리에서 마시던 술잔을 건네며 호의를 표시하는 사람에게 자기 잔으로 마시자고 하면 분위기가 다소 어색해지는 경험을 하거나 목격하는 경우가 있다. 필자의 경우는 밝은 표정으로 예의를 갖춰 내가 마시던 잔에 받아도 되겠냐고 상대에게 동의를 구하고 나의 잔으로 받는다. 그리고는 상대방의 감정을 살피며 자연스럽게 상대의 잔을 채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별 잘못 없이 뭔가 상대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경우 원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에게 오는 잔을 억지로 받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생각해보면 이것도 하나의 억압이다.

간혹 졸업한 제자들과의 자리에서는 술잔 돌리지 않기를 한국의 문화혁명 수준으로 격상시켜 강조하곤 한다. 왜냐하면 아직 일부 젊은 층까지도 잘못된 문화학습 때문에 자신의 술잔을 권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호의와 예의의 표시라고 시대착오적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술잔 돌리기가 여러 가지로 심각한 건강상 문제를 발생시킴은 구체적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이다. 실제로 국민건강증진법 제8조에 따라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과다한 음주가 국민건강에 해롭다는 것을 교육·홍보하고 있다. 그리고 전국의 여러 지방자치단체와 공공기관, 사기업에서 술잔 돌리기 추방운동이 진행되고 있기도 하다. 한국의 술잔 돌리기는 세계적 수준에서 볼 때 매우 예외적이며 비문명적이다.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발견하는 문화적 충격 중에 하나가 식당에서 찌개를 같이 퍼 먹는 모습과 함께 술잔을 돌리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입에 들어갔던 젓가락으로 상대방에게 음식을 집어 건네주는 호의(?)에 질겁을 하기도 한다. 이들의 놀라움에 대해 무슨 민족 자존심 같은 걸로 분노하는 사람이 간혹 있긴 하나 이것은 올바른 문제인식이 아니다.

술잔 돌리기의 더욱 심각한 문제점은 이것이 개인에게는 물론 공공적으로도 폭력적 성격을 띤다는 점이다. 술잔 돌리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분위기에 의해 끌려가는 음주문화는 비자발적이며 억압적이다. 더군다나 직장에서 우월적 지위에 있는 상급자가 돌리는 술잔을 싫어도 억지로 받을 수밖에 없는 부하 직원 그리고 많은 여성 직원들에겐 더욱더 그러하다.

술을 잘 마신다는 것은 많이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 마시는 분위기를 즐긴다는 의미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상대방에게 대한 배려가 중요하다. 그런데 술이 센 것을 무슨 대단한 능력으로 생각하고 과시하는 잘못된 음주문화가 아직도 잔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전문가 의견에 따르면 경험적으로 볼 때 엄밀한 의미에서 술이 센 사람은 없으며 단지 음주의 순간적·단기적 영향을 감당하는 능력에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한다.

따라서 서로가 무리한 음주를 강요하는 술잔 돌리기는 사회 전체적으로 과다한 음주를 조장해 개인과 공공의 건강파괴라는 사회적 비용을 유발시킨다. 이와 함께 술잔 돌리기가 한국사회의 부패 네트워크 형성과도 무관할 수 없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젠 ‘술잔 돌리기는 여러 가지 질병을 선물하는 것이다’라는 상식적 수준의 캠페인을 넘어서서 이것이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침해하는 폭력성을 지니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돼야 한다. 술잔을 돌리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인간적이고 정겨운 대화의 술자리를 만들 수 있다. 술잔 돌리기도 폭력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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