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의 역학이야기>업과 업(業)
<이준의 역학이야기>업과 업(業)
  • 경남일보
  • 승인 2013.0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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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팔자(八字)
“세상만사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주변에서 흔히 듣는 말이자, 우리 모두 일상에서 느끼고 있는 일들이다. 세칭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만 바라보는 이들은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거나 계산이 틀렸거나 힘이 모자라기 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단정해버린다. 반면 운명론자들은 알 수 없는 초월적인 어떤 힘이 작용하여 세상사를 내 뜻대로만 되지 않게 만든다고 믿고 있다. 사실 살다보면 참으로 희한(稀罕)한 일들이 한 둘이 아니다. 어떤 때는 전혀 예기치 않았는데 주변의 분위기가 나도 모르는 새에 잘 조성되어 슬슬 잘 풀려 나가는가 하면, 어떤 경우엔 모든 여건이 명약관화(明若觀火) 분명한데도 대추나무 연줄 걸리듯 꽁꽁 얽혀들어 도무지 풀려나가지 않는 경우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도대체, 무엇이, 왜, 어떤 이유로 우리들의 뜻과는 관계없이 모든 일들이 제각기 흘러가는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내 뜻대로 되지 않게 만드는 것일까? 보통 이 대목에서 사람들은 “팔자려니∼”하는 체념과 “전생의 업보(業報)”라는 핑계와 지난날 자신의 인생행로를 되뇌는 회한(悔恨)에 젖어들기 마련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이를 업(業, karma)이라하고, 이를 끊는 것이 곧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을 하지만 그것이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먹고 살아야 하는 몸이 있고, 그 몸을 움직이는 마음이 있는데, 어찌 업장이 그렇게 쉽게 소멸하겠는가 말이다. 마른 땅에 살포시 바람일어 먼지 피어오르듯, 마음 밭에 살며시 바람 불어 삶에서의 인연(因緣)들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서로 서로 엮어지는데, 어찌 산목숨이 이를 냉정하게 끊어 낼 수 있겠는가 말이다. 우리는 업에서 진정 자유로울 수가 없다.

하여 여기서 다시 하나의 “업”을 말한다. 이 “업”은 불가의 “업(業)”과는 전혀 다른 업으로 순 우리말이기에 여기에 맞는 한자가 없다. 그냥 업이고, 이 업을 말하는 것이 업 사상(思想)이다. 순 우리말로서의 업은 좋은 것, 밝은 것, 복될 수 있는 씨앗을 의미한다. 업다. 업어간다. 업둥이 등으로 우리가 일상에서 늘 쓰고 있는 말이다. 자식을 업다, 복을 업어간다, 업둥이를 기른다 등 마음이 기꺼워하는 고역(苦役)의 기쁨을 말한다. 불가에서의 업(業)이 윤회의 굴레 안에서 어쩔 수 없이 감내하여야 할 족쇄의 성격이 강하다면, 업 사상의 업은 괴로움을 좋은 것으로 바꿀 수 있는 씨앗 내지 희망을 말한다.

따라서 사주에 적혀있는 여덟 글자를 대할 때 “업(業)”과 “업”을 동시에 살펴야 한다. 업(業)이란 원인으로서의 과거의 흔적에 대한 결과이다. 현생에 살아있을 때 가깝고 먼 과거에서의 자기의 인생여정, 자기가 태어나기 전, 온갖 군상(群像)이었을 때의 자기가 저지른 흔적의 결과로서의 지금, 이것을 나타낸 것이 드러난 사주팔자이다. 하지만 이 사주팔자는 정지된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되고자 한다. 움직여서 더 좋은 무엇으로 살고자 한다. 즉 사람들은 현재보다 다가올 날의 더 나은 더 좋고 복된 삶을 원한다. 이런 지향성을 가진 것이 우리말 업이고, 지금 하여야 할 바이며, 그림자처럼 숨어서 작용하는 마음의 힘이다. 새로운 팔자를 만드는 내용이다. 즉 비유하자면 태어난 생년월일시의 팔자가 불가에서의 “업(業)”이라면, 그 사주팔자가 불러들이는 숨어서 움직이는 힘으로서의 사주팔자, 보이지 않지만 강렬한 희망으로의 사주팔자, 지금 마땅히 해야 할 당위와 의무로서의 사주팔자는 우리말 “업”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숨어서 그림자처럼 작용하는 우리말 업에 해당하는 사주팔자는 대대(待對)작용으로 유추할 수 있다. 즉 천간합과 지지충의 작용이 기본원리이다. 예컨대 천간에 갑(甲)이 있다면 갑은 당연히 기(己)를 추구하려한다는 것을 간파하여야 한다. 갑이 있다고 하여서 갑만 생각하여서는 반쪽 밖에 보지 못하는 것이다. 총각이 홀로 방에 박혀있다고 하여서 총각의 일상만, 처녀가 독신을 고집한다고 하여서 그 말만 곧이곧대로 들어서는 안 되는 이치로, 총각은 처녀를, 처녀는 이상향의 총각을 마음에 품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이치로 을을 경을, 병은 신을, 정은 임을, 무는 계를, 해묘미는 사유축을, 인오술은 신자진을, 자는 오를, 묘는 유를, 진은 술을, 축은 미를 추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단 역마성이 강한 인사신해는 독자성이 강하여서 상대를 추구하는 성향이 약하다. 정보통신시대에 진술축미의 성향을 신중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발현되는 힘의 크기는 원국에 나란히 있을 때, 대운과 세운에서 올 때 다르게 나타나니 이를 신중하게 고려하여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며, 귀에 들리는 것도 모두가 아니다. 어찌 꼭 예수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찔러보고 난 다음에야 부활을 믿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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