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인(愚人)의 길
우인(愚人)의 길
  • 경남일보
  • 승인 2013.0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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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형란 (경상대 사범대부설고 교사, 시인)
북경의 경산공원 위에서 자금성을 내려다본다. 새벽 비행기 기내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전문대가를 지나 북경의 시내에 몸을 얹었을 때는 한낮이었으나, 짙은 안개와 진눈깨비는 여전히 변함 없었다. 천안문과 자금성을 모두 지나니 타국에서의 쓸쓸함이 절정에 달했다. 그래서일까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와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가 떠오른다.

명의 숭정제는 결국 이 공원의 소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했고, 영화 ‘마지막 황제’ 에서 저 자금성의 북문으로 빠져 나간 푸이는 총을 겨눈 일본군 사이에서 황급히 차에 올라 만주로 떠났다. 그리고 일본군은 푸이에게 새로운 만주국의 황제를 꿈꾸게 했고, 푸이는 일본군의 철저한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황후는 일찍 그 진위를 알고 만류했으나 권력에 눈이 먼 푸이는 깨닫지 못했다. 그의 어리석음으로 황후는 아편중독자가 되고 그녀의 삶은 추락했다. 푸이 역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다.

연암 박지원은 8월 1일자 열하일기에서 북경에 도착한 후 황성에 대한 기문을 썼다. 성인 창시론과 우인 계승론을 논하며 당시 아시아의 중심에 있는 청 왕조를 우인(愚人)이라 했다. 성인과 우인의 차이점은 도덕성이다. 우인이 이 때문에 후세의 비난을 받았지만 연암은 오히려 이들도 백성들의 삶의 질에 긍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인정한 것이 흥미롭게 읽힌다. 연암이 청을 바라보는 관점은 진보적이고 계몽적이다. 그런데 우인 이라는 단어를 활용한 연유는 무엇일까.

학자들은 이 우인을 후대의 황제와 왕(만큼의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을 함축하는 말이라고 했다. 그러나 정치 지수가 낮은 나로서는 도덕성과 공적의 균형이 어떠한가를 두고 논쟁하기에 앞서 내가 진정 우인(愚人), 즉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표면 그대로의 뜻에서 아주 오래 머물러 있었다. 시대와 운명의 지배 관계에 끌려가는 마지막 황제 푸이의 어리석음을 탓하기 전에 나 역시 하루에도 몇 번씩 성급함이나 경솔함으로 잘못된 판단을 한다. 그리고 꼭 후회의 과정을 거치며 어쩔 수 없는 나의 어리석음을 책망한다. 그래서 성인군자 같은 사람보다 나 닮은 어리석은 사람을 만나면 더 편안한지 모르겠다.

어느 날, 공부란 인생의 오묘한 비밀에 접촉하는 것이라는 구절을 읽고 시들하던 공부에 생기를 찾은 적이 있다. 우인이지만, 우인이지 않은 이 미묘한 역설(逆說)이 역설(力說)같아 연암선생이 말한 우인을 잿빛으로 경계가 없는 경산 공원 위에서 다시 더듬는다. 자본주의의 물결에 몸을 푼 중국은 여전히 국제적 메카니즘의 중심에 서 있고 야누스같은 세월에도 저 자금성은 오늘을 주목하고 있다. 내일의 어제가 오늘인 것만은 분명한 현실에서 우인(愚人)의 길은 나에게 또 다른 사색을 요구한다. 운명을 다했기에 새로 구입한 4G 휴대폰의 덮개를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말이다.

/경상대사범대부설고 교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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