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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염없는 옛이야기 감싼 그윽한 매화향(39) 고성 방화골 매화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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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3.0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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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방아골 황씨매
 
겨울이 꼬리를 얼른 사리지 못하고 미루적거려도 어느새 바람결의 매운 맛은 풀이 죽어 한결 부드러워졌고 볕살도 도톰해져서 양지쪽의 따사로움이 눈시울이 지긋하게 정겨움이 감돈다. 이맘때이면 양지바른 남새밭의 겨울 도사리배추는 한껏 파랗게 생기를 되찾아 흙냄새와 함께 상큼한 풀냄새가 묻어오고 어디에선가 향긋한 매화꽃 향기가 번져오는 남촌의 봄이 그리워진다. 과학문명의 매정스런 질주를 그래도 따라잡으려고 안간힘을 다 쓰며 달음질을 쳐봐도 어제 같은 일상의 쳇바퀴만 돌고 도는 숨 가쁨의 고단함에 연방이라도 풀썩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지만 언 땅을 녹여내는 봄의 손짓에 또 한 번 기지개를 펴고 매화꽃이 제일 먼저 핀다는 고성군 대가면 방아골의 고매를 찾아 봄 마중을 나섰다.

알곡을 찧어내는 ‘방아’인지 꽃향기를 품어내는 ‘방화’인지 발음조차도 정확하지 않은 지명을 소문만 듣고 찾기란 여간 어려운 길이 아니다. 그렇다고 네비게이션이나 행정관서에 물어보면 이내 알아 낼 수도 있겠지만 길손은 길을 나서서 사람을 만나 사람에게 길을 묻고 길을 찾는 것이 멋이요 맛이며 깨우침이다. 어른아이 가릴 것도 없고 외양도 품위도 가늠할 것 없이 오가는 사람이면 어떠하며, 일하는 사람도 잠시 허리를 펴게 하고, 인기척이라도 나면 괜스럽게 물 한 바가지 얻어먹자며 인연의 끄나풀을 이어가며 이래저래 서로가 잊어버렸던 인정을 되찾아야 할 의무도 사명도 일깨워야 할 오늘이 아닌가?
 
4방아골 고매


고성읍에서 아무나 붙잡고 ‘아’도 아니고 ‘화’도 아니게 얼버무려서 ‘방와마을’을 묻고 물어서 얻어낸 답이 ‘방아골’이라면서 고성읍에서 대가면 사무소 쪽으로 가다가 대가저수지 못미쳐서 좌회전을 하라는 말을 듣고 차를 몰았더니 대무량사와 약수암을 알리는 작은 표지판이 어수룩하게 서있었다. 포장도로를 따라 들길로 접어들자 봄은 이미 발끝까지 다가와서 휑하던 논과 밭은 봄보리와 풀씨들이 생기를 되찾아 파랗게 물들고 있었다.

작은 도랑의 다리를 건너자 담장 밑에 붙어선 작달막한 마을 표지석이 ‘평동마을’이라고 알려주며 ‘방아’도 ‘방화’아닌 ‘시달’로 쓰여 있어 무턱대고 좌회전하여 도랑을 따라 길머리를 잡았다. 평동마을을 지나자 길은 트여있으나 도무지 마을이 있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골’ 이라면 어딘가의 골짜기에 있겠지 하고 무작정 길을 따라 산 쪽으로 접어들자 좌우로 소나무 숲이 황토 흙을 빨갛게 바닥에 깔고 짙은 숲을 이루며 시멘트로 포장된 산길을 내어 준다. 야트막한 비탈을 오르자 산등줄기를 가르마를 타듯이 좌우를 내려다보게 한가운데로 산길이 빤하게 이어졌다. 한참만에야 건너편에 양지쪽에 서너 집이 다닥다닥 붙어서 이른 봄의 볕살을 한가득 품은 채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그림같이 앉았다. 들머리의 좁다란 공터에 차를 세우자 건너다보이던 집들은 대나무 숲에 숨어버리고 갈림길의 왼편 저만치에도 두서넛 집이 옹기종기 붙었는데 어수룩한 표지판은 ‘약수암’이 있으니 “가 볼 테면 가보시우” 하고 논두렁에 삐딱하게 등을 기대고 시건방졌다. ‘어험’하고 헛기침을 한번 했더니 맞은편으로 빤하게 보이는 언덕위의 외딴집에 커다란 매화나무가 근엄한 자태로 지켜보고 서있었다. 고성에서 제일 먼저 핀다는 고매 임을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밑둥치는 속살까지 삭아서 깊은 골이 파였고 온갖 풍상의 고단함이 껍질마다 역연한데 가지가 무성하여 인고의 수령은 가늠키가 어려운데 볼통볼통한 꽃망울을 하얗게 피우고 있었다.
 
5방아골 약수암
6방아골 약수


옛 주인은 간곳없이 빈집에 홀로 남아

가시 돋은 엄나무를 사립 앞에 세워두고

두고 간 이 돌아오길 학수고대 기다리며

옛 정 깊어 정월달에 서둘러서 피었네.

화투 열 매조도 2월이 아니던가? 춘설이 난분분 할까봐 필동말똥 망설이는 인간사 지조 없어 마음 둘 곳 없는데, 오르지 절개와 지조의 꽃으로 피어난 고고함이여! 매일생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 한평생을 춥게 살아가더라도 결코 그 향을 팔지 않는다 했으니 말을 보태면 때를 묻힐 일이다.

두고 떠나기 아쉬워서 고매의 둥치를 쓰다듬어 보고는 발길을 돌려 대밭 속으로 뚫어진 골목을 들어서자 또 한 그루의 고매가 사림문도 대문도 없는 집의 축대 끝에 우뚝 서서 이제 막 하얀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둥치 아래쪽은 삭을 대로 삭아서 깊은 골이 파였고, 옆으로 난 가장 큰 가지는 오래전에 삭아서 잘려나간 자리에는 커다란 구멍이 옹처럼 남았다. 담장 아래에서 도사리배추를 캐시던 할머니가 인기척을 알아채고는 반갑게 맞이하시기에 매화구경을 왔다했더니 옆집에 나란하게 사신다는 시숙까지 불러내셨다.

팔순을 훨씬 넘기신 배기윤 할아버지는 대학 2학년 때 학도병으로 6·25에 참전하셨다며 건너편 산이 두 가랑이에 방아공이까지 확연하게 디딜방아처럼 생겼다하여 ‘방아골’이라시며 아까 본 매화는 황씨집의 백매화로 고성에서는 제일 먼저 피고 그 다음으로 네댓새 뒤를 이어 아우인 배기준씨의 백매화가 핀다면서 과실이 자잘한 순수한 토종은 이제 이 한 그루만 남아서 수령 150여년을 꽃피워 왔단다. 술을 담그면 세 번을 우려도 그 향이 진하다며 일제강점기에는 관에서 따 갈 정도로 유명했다고 박씨 할머니도 거들고 나서신다. 방아골 소개는 끝이 없이 이어지며 뒷산 중턱의 흔들바위는 선바위라 했는데 그 덩치가 너무나 커서 흔드는 사람은 흔들리는 줄 모른다하고, 약수암으로 가면 그 옛날엔 절은 없었지만 칠월칠석이면 대구와 광주 등 타도에서까지 물을 맞으러 온다고 작은 골짜기가 인산인해로 메워졌다며 만병통치의 영험한 약수이니 한 모금 꼭 마시고 가라셨다.

한 여름에도 “차갑다” 소리하면 효험이 없다는 말씀을 염두에 두고 차를 몰아 금방 약수암에 닿았다.

산골 암자가 다들 엇비슷한데 겨울 가뭄이 꽤나 길었는데도 넉넉한 수량은 예사롭지 않고, 나무홈통을 타고 흐르는 물은 세상사의 순리를 일러주며, 도랑물 소리는 카랑카랑하여 머릿속을 씻어 준다. 대웅전 뒤편의 산신각에도 그러했듯이 약사전 안의 불단 아래에도 암반의 약수샘이 청정옥수를 가득 채우고 고단한 중생들을 기다리며 쪽박이 놓여 있다. 헌향삼배로 예를 갖추고 한 모금을 들이켰다. 여름이 아니라서 차갑지도 않거니와 부드러운 뒷맛이 달짝지근했다.

물소리 말고는 괴괴하고 조용하여 내쉬는 숨소리조차 부담스러운데 이따금 달그랑 거리는 풍경소리는 더없이 청아하다. 인기척을 내시던 주지 수운스님과 찻잔을 마주하고 약수의 내력을 들으며 흔들바위로 가는 길을 묻자 주변경관을 자상히 설명하던 진오스님이 전국에서 제일 클 것이라며 동행을 자처하여 산길로 들어섰다. 간간히 잡목의 군락 말고는 아름드리 낙락장송이 울울창창 하늘을 가리고 송진 냄새가 옷 속까지 스며든다. 산허리를 감도는 비스듬한 산길은 자잘한 잡목들을 베어내고 덤불까지 걷었으나 오가는 사람이 없어 허술하기 그지없다. 동안거를 마치고 나오신 일광스님은 시종 묵언이시고 신도들의 산행을 권장하고자 그 옛날 나무꾼들이 줄지어 다녔던 흔들바위까지의 옛길을 겨울 내내 산속에 파묻혀서 주지 수운스님이 터놓은 길이란다.

멀리 고성읍이 한 눈에 들어오고 바다가 호수처럼 아련하게 앉았는데 코앞에 다가선 웅장한 바위는 길쭉한 달걀모양을 하고 절벽위의 바위 끝에 꼿꼿하게 서있었다. 크기에 압도되어 과연 흔들리는 흔들바위 일까가 미심스러웠다. 용을 쓰고 밀어 보았다. 아무리 밀어 봐도 흔들거리는 것 같지가 않은데 저만큼 떨어져서 보고 있던 스님이 “흔들린다.” 하고 소리쳤다. 스님을 흔들라하고 자리를 바꾸었다. 결과는 노력의 필연적 산물이다. 거대한 선바위는 사바세계를 향해 끄덕끄덕 흔들거렸다./지역문제연구소장

3방아골 백매
7방아골 흔들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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