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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운드 누비던 빠른 발의 골잡이<경남축구열전> 지도자로 자리잡은 고봉우
임명진  |  sunpower@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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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3.0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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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축구국가대표 출신 고봉우(67)씨. 작은 체구이지만 100m를 11초대의 빠른 발을 주무기로 상대 문전을 휘젓고 다니며 이회택, 노흥섭 등과 60, 70년대 그라운드를 누볐다.

그로부터 수십년이 세월이 흘러 지금은 그때의 면모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축구를 향한 열정 만큼은 여전히 강인한 느낌이다. 지금은 고향에서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는 그를 만났다.

◇진주농고 전국 우승 이바지

고봉우는 산청 생초 출신이다. 어릴 적 키는 작았지만 볼 재간이 남달랐던 아이였다. 재능은 있었지만 축구선수로서의 꿈을 꾼 것도 아니었다. 공부도 잘해 진주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유학길에 올랐다.

그의 축구재능이 우연히 빛을 발했다. 3학년 당시 학교에서 열린 교내 축구대회에서 고봉우는 반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의 축구실력을 눈여겨 본 학교 관계자들은 그에게 축구부 입단을 권했고, 그렇게 고봉우는 축구와 첫 인연을 맺었다.

고봉우는 100m를 11초대에 돌파하는 빠른 주력을 갖춘 선수였다. 작은 체구였지만 빠른 발을 갖춘 그를 상대 선수들은 번번히 사이드를 내줘야 했다.

1966년 3월 당시 진주농고(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축구부 창단 멤버로 진학하면서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고향 진주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진주고와 진주농고의 축구 라이벌 구도가 마치 대학 연고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축구 붐이 최고조였다.

“당시만해도 아들이 있으면 진고 아니면 농고를 다닌다고 할 정도였으니깐, 진주중학교에서 시합을 하면 양 학교의 동문, 시민들의 응원전이 정말 치열했어. 그때가 정말 재미있는 시절이었지”

고봉우는 절친 노흥섭과 함께 진주고 격파 선봉에 서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데, 나름 목표가 있었다.

“창단팀이라서 사실 실력은 우리가 조금 모자랐지. 그래도 우리끼리는 목표가 있었는데, 첫 해는 진주 제패, 그 다음해는 경남 제패, 3년내 전국대회 우승을 목표로 했어”

다들 꿈이 너무 거창하다고 했지만 고봉우는 졸업을 앞둔 3학년, 1965년 6월에 열린 당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던 대통령배 전국고교축구대회서 모교 우승에 크게 일조했다.

당시 진주농고의 우승은 지방에서는 29년 만에 거둔 첫 우승의 영광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모교에서 당시의 우승을 기념하는 전국제패 기념탑을 건립할 정도였다.

이 대회서 고봉우는 예선마다 골을 넣으며 우수 선수 공로상을 수상하며 전국 무대에 고봉우라는 이름 석자를 또렷히 남겼다.

◇대학 스카우트 파동 마음고생

대학 진학을 앞둔 고봉우는 이회택과 함께 대학 팀의 영입 1순위 였다. 당시만 해도 한국 축구는 연고대의 라이벌 구도가 지배하던 시절.

“당시 고교랭킹이 이회택이 1위였고 내가 그 다음이었어. 그런대 서울의 모 대학이 새로이 축구부를 창단하면서 복잡해 진 거야”

파격적인 조건을 내건 그 대학의 가세로 뺏고 빼앗기는 영입 경쟁이 치열해 졌다.

여러 대학이 얽히고 섞이면서 고봉우는 대학 스카우트 파동에 휘둘렀다. “이런 일도 있었어. 하루는 고교 은사 처제라는 어여쁜 아가씨가 찾아온 거야. 동생이 서울 모 대학에 시험을 치는데 어느 과가 좋은지 알아봐 달라는 거야”

고교 은사 처제의 부탁에 입학원서까지 구해 주었다. “그런데 그 처제라는 아가씨가 고맙다고 저녁에 밥을 사겠다는 거야. 그래서 다른 동료랑 시내로 나가다가 그길로 지프차에 태워져서 끌려간 적도 있었어”

당시의 일은 신문 사회면에 대문짝하게 나올 만큼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만평에도 나왔어. ‘미인계를 동원한 대학 스카우터 이래도 좋은가’라고.(웃음)”

그 여성은 나중에 유명한 영화배우가 되었다고. 고봉우는 “지금이야 웃으며 당시의 일을 회상하지만 그때는 정말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고 했다. 고봉우는 우여곡절 끝에 한양대로 진학했다. 대학 졸업할 무렵에는 랭킹 1위를 다투는 선수가 돼 있었다.

◇자나깨나 축구 생각 뿐

고봉우는 대학 3학년 때 처음으로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68년 부터 뮌헨월드컵 국가대표 선수로 활약했다. 아시아 1위를 했지만 오세아니아 호주에 1-2로 패해 월드컵 무대는 밟아보지 못했다.

고봉우는 대학 졸업하던 해인 1970년 당시 실업 최고의 팀인 외환은행에 입단하고 나서는 줄곧 부동의 공격수로 명성을 날렸다.

포지션은 센터포드였지만 윙도 맡아 상대 문전을 헤집고 다녔다. 특히 사이드를 뚫고 문전을 향해 올리는 공격은 타 팀의 경계 1호였다.

은퇴 후 고봉우는 국가대표 코치, 한중일 한국대학 대표 선발팀 감독, 제1회 아시아 풋살 선수권 대회 한국 감독, 풋살 세계선수권 대회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

외환은행 재직 중에 고봉우는 경상대학교 축구부 창단 감독으로 고향으로 내려왔다. 감독 재임시 남다른 정성으로 제자들을 지도했다고 한다. 당시 가르쳤던 제자들이 현재 실업팀과 프로팀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또한 각급 학교에서 체육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지역 축구 경기시설과 축구 붐 조성에 노력하면서 자라나는 꿈나무 학생들의 운동선수 육성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다. 경남축구협회 이사와 부회장 등을 지내며 지역 축구 활성화에 열과 성을 쏟았다.

고봉우는 “우리때는 그야말로 맨 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축구를 했는데, 재능있는 아이들을 많이 길러보고 싶어. 그게 축구발전에 이바지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내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 공로로 92년 자랑스런 진농인상, 95년 진주시 체육상, 96년 진주시 문화상, 2004년 경남도 문화상, 대한축구협회장 공로상 3회 수상, 2010년 전국체육대회 유치표창패 등을 수상했다.

※고봉우는

▲1946년 6월생 산청 생초

▲산청 생초초-진주중-진주농고-한양대

▲주요경력

뮌헨월드컵 국가대표 선수(1968)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대표팀 코치(1988)

세계풋살선수권대회 대표팀 감독(2000)

고봉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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