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폭력 저항정신으로 이룬 '평화의 행진'
비폭력 저항정신으로 이룬 '평화의 행진'
  • 여선동
  • 승인 2013.03.1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남 최초 만세운동 '칠북 연개장터 의거'
칠북삼일독립운동기념탑
3.1 독립운동기념탑
 
 
경남 최초의 만세운동으로 알려진 함안칠북의 연개장터 만세운동이 지난 3월 9일 재현됐다. 이날 만세운동 당시 연개장터였던 칠북면 칠북초등학교 이령분교에서 기관과 유족, 지역주민, 학생등 10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경남 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된 만세운동을 재현하고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삼창, 헌화 분향한 뒤 대한독립 만세를 재현했다.

1919년 3월 9일 당시 칠북 이령교회 장로였던 김세민 선생과 그의 사위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배동석 열사가 중심이 돼 군중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평화적 행진을 벌인 만세운동은 3·1독립운동의 비폭력저항 정신에 따라 일본경찰과 물리적 충돌 없이 끝난 경남 최초의 의거였다./편집자 주

▲김필오 옹
한반도를 만세 물결로 뒤덮었던 전 민중의 구국 의지의 발현 3·1 만세 운동은 전국방방 곳곳에서 만세 운동 기록이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치단체별로 그 지역의 만세 운동을 집중 조명해 나가는 과정에 오류를 범하고 있다.

경남 최초 의거로 알려진 영산·밀양 의거는 사실상 함안군 칠북의 연개장터 의거보다 늦게 일어났던 의거이기 때문이다.

1979년 9월10일 삼일동지회가 발간한 경남부산 3·1운동사에는 ‘각 도별로 제일 처음 3·1운동이 일어난 일자는 3월 1일에 서울·황해도·평안남북도·함경남도《중략》 3월 11일 동래 의거를 필두로 경상남도의 만세 운동은 도내로 번져 3월 13일 영산·밀양에서, 3월 14일에는 창녕·통영에서 일어났고 점차로 도내 각 군·면으로 확대되었다.’라고 되어있다.

그리고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2006년 12월 발간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7집과 2006년 2월 발간한 함안 3·1운동사 연구용역보고서를 통해 이미 1919년 3월 9일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 연개장터에서 경남 최초의 의거가 일어났음을 밝혔다.

또 1998년 함안문화원이 발간한 함안 항일독립운동사와 2001년 국가보훈처 마산지청이 펴낸 경남항일운동 참여록 등의 자료와 2005년 부경역사연구소의 지역과 역사 16집에서 고찰된 함안지역 3·1운동 연구에서도 이미 칠북 연개장터 의거가 체계적으로 준비되고, 의식적이고 주도적으로 추진되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연개장터에서 경남 최초의 의거가 일어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 칠북 이령교회의 장로를 맡고 있던 김세민 선생과 그의 사위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배동석 열사와의 인연이 있다.

지난 8일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김세민 선생의 다섯째 아들인 김필오(85·칠북면 덕남리 거주)옹의 자택을 방문해 당시 이야기를 밤늦은 시간까지 들어봤다.

고령의 나이에도 지난날을 회상하며 하나씩 던지는 말씨에 그간에 한이 묻어났다. 그는 이렇게 건강을 유지하게 하는 것은 선친(김세민)께서 지난 역사를 바로잡고 생을 마감하라는 뜻으로 생각한다면서 말문을 열었다.

-의거의 시작은.

▲“경남 최초 3·1만세운동은 칠북 연개장터로 평화적으로 일어난 의거다. 제가 1929년 생인데 3·1운동이 일어난 지 10년 후에 태어났고 태어난 지 10년 후에 아버님이 일흔넷으로 돌아가셨으니 철이 들기 시작할 무렵의 모습이 선하게 남아 있다. 그때 선친은 키가 크고 풍채가 당당한 모습에 심지가 굳고 의지가 강한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조모이신 김성아(金聖牙)가 조부와 결혼한 후 저희 선친을 두고 홀로 되었다. 누님인 김복남(金福南)이 1913년 9월 20일 김해 장로교회를 세운 배성두의 아들 배동석과 결혼했다. 매부인 배동석은 1906년 대구 계성학교에 재학 중 항일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3개월간 복역한 후 중퇴하고 서울 경신학교를 졸업했다. 목포에서 교직생활을 하다 다시 체포되었는데 석방된 후 만주에서 김좌진 장군과 함께 활동했다. 1918년 귀국해 경성연합의전(京城聯合醫專)에 다니면서 3·1운동을 주도했는데 1919년 2월 23일 민족대표의 일원인 이갑성이 경남지방 민족대표 추천을 위해 마산에 왔으나 선언서에 첨부할 날인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서 마산의 이상소, 임학찬을 잘 아는 배동석을 다시 보내었다. 이때 서울의 상황을 전하게 되니 2월 28일 선친과 당숙인 김두량(金斗良), 재종형인 김순 등이 교회에 모여 독립운동을 위한 준비모임을 가졌으며 이후 선친이 서울로 가면서 집안이 모두 3·1운동에 참여하게 됐다”라고 전했다.

-의거 준비는 누가 했나.

▲3월 5일 이령리로 돌아온 선친은 다음날 29명의 동네 사람을 모아 교회에서 준비모임을 갖고 3월 9일 연개장날에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선친과 당숙이 시위준비를 주도하면서 대책위원으로 윤기선, 여봉준, 곽성복, 김주현을 선임해 사람을 모으고 태극기를 만들도록 시켰으며, 선친은 서울에서 내려올 첫째 아들(김정오)도 선임했다. 김정오는 3월 8일 서울에서 내려왔는데 이때 독립선언서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당시 칠북 연개장터 의거 상황은.

▲3월 9일 연개장터에는 수천 군중이 집결했다. 정오에 대회장을 맡은 선친이 개회사를 하였으며 유광도의 격려 연설에 이어 김정오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선친이 1904년 사립 경명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었는데 낭독이 끝난 이후 지역유지와 경명학교 학생들이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니 시위군중이 따랐는데 영서, 영동, 상봉촌, 하봉촌을 돌면서 해가 저물 때까지 만세를 불렀다. 이때는 평화적인 독립운동의 기조에 입각해 기물을 파손하거나 사람을 해하는 일 없이 3·1운동을 마치고 자진 해산했다. 지역을 관할하는 마산경찰서 칠원주재소에서도 정보수집을 못해 3·1운동이 일어날 줄 모르고 있었으니 연개장터 의거는 그렇게 평화적으로 막을 내리게 됐다.

-연개장터 의거가 다른 의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데.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에 16명이 기독교인으로 당시 3·1운동은 교회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함안에서도 이령교회를 중심으로 한 연개장터 의거에 이어 3월 12일과 17일에 대산교회가 주동한 평림의거가 일어났다. 특히 칠원에서는 3월 23일과 4월 3일, 8일, 13일에도 일어났다. 그리고 현재 밀양과 함께 영산의거가 경남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되었다. 영산교회는 선친께서 직접 설립한 것인데 연개장터 의거에 교회 사람을 불러 참여시키고 따로 만세운동을 하도록 시킴으로써 13일 의거가 일어날 수 있었다.

-의거 후 많은 분이 옥고를 치렀을텐데.

▲매부이신 배동석 열사는 3월 1일 종로 탑골공원에서 학생대표로 3·1운동에 참여하였으며 3월 5일에도 남대문 역 앞에서 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었다.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의 형을 받았으며 이에 불복해 공소를 제기했으나 1920년 4월 27일 기각되었다.

복역을 마치고 고향 김해로 돌아왔는데 눈알이 모두 없고 손톱도 모두 빠지고 없었으며 심한 고문에 병을 얻어 죽기 일보직전이었다. 매부는 그 이듬해인 1921년에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는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정오는 4월 21일 서울로 올라가서 4월 26일 체포되었는데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 8월 4일 방면되었다. 8월 7일 친구인 이영식과 수비대에 잡혀가 3개월간 모진 고문을 당하고 불구자가 되어 석방되었다. 1980년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당숙인 김두량은 연개장터 의거 이후 4월 3일 칠원 장터에서 선두에 서서 만세를 불렀고 주재소에 돌을 던지며 구속자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며 다시 친일파인 칠원면장의 집으로 쳐들어가 봉변을 주고 있다 체포되어 주모자로 모진 고문을 받았으며 마산형무소에서 6개월의 형을 받았다. 1992년 대통령 표창에 추서하였다. 그 아들 김순도 마산 창신학교 고등과 재학 중 독립신문 발행에 가담해 1년 6개월의 형을 받았으니 집안 모두 감옥 생활을 했다.

-당부하고 싶은 말은.

▲당시 3·1운동은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숭고한 염원의 발로였다. 국민 모두가 그때를 생각하며 하나로 뭉쳐 잘 사는 나라로 만들어야 하며, 정도의 길을 걷길 바란다. 또한 국가유공자 집안이지만 자녀 중에 아무도 수당을 받는 사람이 없다. 의당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국민 모두가 선조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젊은이들은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으로 살아갔으면 한다.
 
칠북삼일운동_재현
연개장터 만세운동 재현 장면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