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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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일보
  • 승인 2013.04.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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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경남의 아나키즘 운동과 이진언 시인(상)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46)
<7>경남의 아나키즘 운동과 이진언 시인(상) 
 
새로 발굴된 이진언(1905~1964)의 시집 ‘행정(行程)의 우수(憂愁)’(1933. 한성도서)는 자료적 가치가 충분하다. 최근 아나키즘(무정부주의) 운동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서 연구가들(조동범 등)이 이진언의 시집과 정치적 행로를 짚어보는 데 시간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이진언은 경남 안의 출생으로 연희 전문과 일본대학 문학부에서 공부했다. 1933년 4월 12일 서울 소재 출판사 한성도서에서 시집 ‘행정의 우수’를 발간했는데 이 시집은 경남사람이 낸 현대시집으로는 최초로 나온 것으로 역사성이 있다.

지난주 금요일(4월 5일) 필자는 송희복, 박노정 시인과 함께 안의에 사는 이진언의 셋째 아들 이동원(1939년생,전 안의중학교 교장)을 진주시내 죽향에서 만나 그의 아버지 이진언에 대해 궁금한 점들을 풀어낼 수 있었다. “아버지는 안의중학교를 광복후 경남 최초로 삼천포중학과 같은 시기에 설립하셨고 초대교장으로 하기락(아나키스트 이론가, 경북대 교수)선생을 모셨고 하기락 선생의 추천으로 통영의 청마 유치환 시인을 다음 교장으로 모셨지요. 아버지는 1946년 7월 7일 창당대회를 개최한 독립 노농당 초대 문교부장을 역임하셨고 2대 민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함양에서 출마해 낙선했고 이후 민주당 구파로 몇 차례 더 출마했지만 낙선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시상이 떠오르면 저보고 받아 적게 하셨지요. 그때마다 시상이 그렇게 빨리 달아나는 것인가, 하고 속으로 불평을 하곤 했었지요. 청마선생님은 저의 은사가 되시지요. 시험 기간 중의 일요일에 제 친구 한 놈이 농월정쪽 개울에 나가 목욕을 했는데 교장 청마가 지나가다가 보았어요. 그 친구는 시험 중인데 밖에 나가 목욕이나 하고 있으면 되는가 하고 꾸중할 것이 걱정이 되었어요. 그런데 월요일 전체 조회시간 교장 선생님은 ‘어제 아무개 학생이 개울에서 목욕하는 것이 자연에 어우러진 한 폭의 그림이었어요. 늘 자연과 더불어 햇볕처럼 밝게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래요’하고 오히려 격려를 해주시는 것이었어요. 그때 우리는 시인은 달라, 하며 더 교장선생님을 존경하게 되었어요.”

그 자리에서 송희복 교수는 “경남 안의는 한국 아나키즘의 메카라고 불리지요. 3·1운동 직후 그 선도자인 손명표가 이 마을의 젊은이를 선동하여 청년회를 열었고 8·15직후인 1946년 4월엔 여기서 전국무정부주의자총연맹 창립대회가 열렸으니까요. 여기에는 이진언과 하기락이 중심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고 받고 나온 이야기 중에는 진주의 아나키즘 활동과 동기 이경순 시인, 그리고 유림(柳林), 유엽(柳葉), 이시우, 하경상, 박노석, 우한용, 방한상, 이동순, 조병기, 손조동, 히충현 등의 이름들이 거명되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 송희복 교수는 이진언 시집을 포함한 ‘경남의 지역문학과 아나키즘의 상관성’을 탈고하여 이메일로 보내왔다. 이 논문에서는 경남지역에서의 아나키즘이 두 개의 유형으로 전개된 것으로 보았다. 하나는 아나키스트 시인들(이진언, 이경순, 박노석)이고 다른 하나는 아나키즘 동반자 시인들(유치환, 이윤택)이다. 송희복이 프로문학의 동반자를 고려하여 ‘아나키즘 동반자’라 한 것이 재미 있다. 거기다 송희복은 연극인이자 시인인 이윤택을 문화 게릴라라는 측면에서 아나키즘 동반자라 한 것이 눈에 띈다. 거기다 경남출신 소설가 일테면 박경리, 김원일, 김인배 등의 소설에서 아나키즘과의 상관성을 구명하고 있다. 박경리의 ‘시장과 전장’, 김원일의 ‘도요새에 관한 명상’, 김인배의 ‘바람의 끝자락을 보았는가’ 등의 소설을 대상으로 삼았는데 생태 아나키즘과의 접목이라는 안목이 지켜볼 만하다 하겠다.

아무튼 안의의 이진언은 한국 아나키즘 운동의 핵심 자리에 놓였고, 그 이념을 정치적 소신으로 하여 국회 진입을 끊임없이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광복 후의 지방의 정치 현실은 혁신이나 진보성향을 받아줄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다. 이진언은 가계가 안의의 토호로서 유년 시절과 학창시절은 구김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지만 정치는 그를 불행과 좌절을 안겨주기만 했다. 그래서 삼남 이동원의 말을 빌리면 “아버지는 술이 되면 늘 비분에 차 있었고, 늘 나락의 심연을 헤매는 분처럼 느껴졌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그가 세운 안의중학교와 시집 ‘행정의 우수’가 전부일 수 있다. 그러나 이제부터 그는 그것으로 역사가 시작되는 시점에 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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