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 새 소설집 ‘김 박사는 누구인가’ 출간
이기호 새 소설집 ‘김 박사는 누구인가’ 출간
  • 연합뉴스
  • 승인 2013.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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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흩뿌려놓은 점들을 이어 이야기를 만들 때 그 문양이 간소할수록 이야기는 매끈해진다. 점의 수가 줄어들면 억울한 사람이 많아지는데 점들을 잇고 또 잇는다 해서 서운한 사람이 줄지 않는 건 피할 수 없는 아이러니다.

파헤쳐봐야 무망한 것이 기억이고 진실이겠지만 이야기로 허기를 달래려는 인간의 욕망은 없어지지 않는다. 이기호의 새 소설집 ‘김 박사는 누구인가’엔 아무리 깁고 기워도 채워지지 않는 삶의 구멍과 그 구멍의 한기를 이야기로 메워보려는 속절없는 애씀에 대한 여덟 편의 단편이 담겼다.

임시직 여섯 중 하나만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기약 없는 약속에 기대 눈 오는 밤 오재우는 출입카드를 찍어 출근기록을 남긴다. 맞은 편 자리의 여자도 눈발을 뚫고 새벽에 출근하지만 출입카드를 갖고 오지 않아 곤란한 상황에 빠진다.

‘눈 내리는 밤, 여자는 아마도 내일 출근길이 걱정되어서 계속 잠을 설쳤을 것’이라 생각한 오재우는 전에 없이 그녀와 친해졌다는 느낌이 들어 그녀를 도우려 애쓴다. 하지만 제 처지로 미뤄 그녀의 심정을 짐작하는 일은 100번 선의였다 해도 미끄러지기 일쑤다.

첫 번째 단편 ‘행정동’에서 서로의 이야기가 갈라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아찔함을 맛보고 나면 다음 단편부터는 미끄럼틀의 길이가 길어지고 경사도 가팔라진다.

갑자기 들려온 소리의 정체와 기원을 찾으려 김 박사의 도움을 받는 스물네 살 아가씨(‘김박사는 누구인가’)나 삼촌이 어느 날 두고 간 고물차로 삼촌의 행적을 탐색하는 조카(‘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나 끊임없이 이야기에 살을 붙이며 진실을 찾지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묘연함은 더욱 깊어질 뿐이다.

이 복잡하기 짝이 없는 인간사를 법과 제도는 간명하게 정리하지만 틈새로 빠져나간 갖가지 사연은 법과 제도라는 빨랫줄을 축 늘어뜨린다. 여자 후배에게 강압적으로 술을 먹여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로 유죄를 받은 남자 제자와 탄원서를 쓰기로 한 선생이 등장하는 ‘탄원의 문장’은 법과 제도도, 사람의 허기도 건져낼 수 없는 깊은 공백의 아득함을 일러준다.

“사실들과 사실들 틈 사이에서 불가능한 것들은 시작되고 피어난다는 것, 그래서 숙명적으로 사실들의 세계에 가려질 수밖에 없다는 것, 거기에서부터 최의 탄원서는 시작되었다.(중략) 나는 최의 탄원서를 법원에 제출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제도는 그녀의 문장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었다.”(205·213쪽)

인물들은 핵심적인 이야기가 있을 것만 같은 장소를 여러 번 찾아가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지는 않는다. 제풀에 신나고 기죽고 하루에 열두 번도 마음 바뀌는 것이 인간인데, 이런 인간들이 뒤섞여 만들어낸 일들은 아무리 많은 문을 열어도 맨바닥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소설집을 들고 내달리다 보면 맨바닥에 결코 도달할 수 없으리라는 무력감이 들다가 숨찬 기운이 가라앉을 때쯤 그것이 운명이고 인생일 것 같은 담담함도 느껴진다. 이 무력함과 담담함 사이를 작가가 건네는 이야기의 힘이 잇는다.

문학과지성사. 404쪽. 1만3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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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 새 소설집 김박사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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