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특집 > 경남문단, 그 뒤안길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47)<8>경남의 아나키즘운동과 이진언 시집(중)
경남일보  |  gnnews@gnnews.co.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5.07.20  16:47:54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47)
<8>경남의 아나키즘운동과 이진언 시집(중) 
 
 
경남 아나키즘 운동의 주요한 인물은 이진언과 동갑인 1905년생 이경순(호 東騎, 1905-1985)이다. 그는 진주 외율리 출생으로 1926년 일본 동경의 일본대학을 중퇴하고 1937년 우라와시에 있는 교호쿠 치과의전(京北齒科醫專)을 졸업했다. 그는 만학으로 30대에 들어 치과의전을 다녔는데 이는 일본의 징병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치과의전을 다니기 전에 동경의 아나키스트 단체인 흑우회에 가입하여 극렬한 행동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1928년 그는 진주에서 경남의 제1호 시인 김병호와 만났고 그로 인해 조선일보에 시‘백합화’를 발표했다. 그때 김병호는 진주에서 전국권의 시지 ‘신시단’을 발간한 사람으로 시단에서는 이경순보다 훨씬 앞서 나가는 사람이었다. 그 무렵 이경순은 일본 천황 즉위식때 학생 탄압이 심해질 것을 대비하여 정태성, 홍두표 등과 귀국하여 금산 청곡사 등을 전전하며 아나키즘 사상을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이때 뜻하지 않게 일경에 검거되어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대구 교도소로 이감되기도 했다. 이경순 등 일제하의 젊은이들이 왜 아나키즘에 경도되었던가를 알기 위해서는 일본의 흑우회관에 붙여져 있던 흑우회 강령을 참고로 할 수 있다.

“1. 우리는 이상사회 실현을 기한다. 2. 우리는 중앙집권제를 배격하고 자주, 자율, 지방분산, 자유연합을 주장한다. 3. 우리는 제국주의 및 독재와 전제정체를 반대한다. 4. 우리는 약소민족의 해방과 독립운동을 동조한다.” 이 강령은 나라를 빼앗겼던 피지배국에서 태어난 젊은이들로 하여금 피를 끓게 하는 것이었고, 행동에 나서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정신적으로 동조하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었다.

후에 사천 곤명과 사천읍에서 치과병원을 차렸던 유봉윤은 이경순과 같이 치과의전을 다닌 사람이었는데 이경순보다는 나이가 열 살 이상 어린 사람이었다. 앞에서 말했지만 이경순은 일제 징병에서 제외되는 의전에 뒤늦게 입학을 했기 때문에 나이 차이가 생긴 것이었다. 유봉윤이 사천읍 주차장 언저리에서 치과를 내고 있을 때 필자는 이명길과 더불어 그 치과를 방문했는데, 그는 이경순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저는 정상적으로 대학에 갔기 때문에 나이가 한창 위였던 이경순과는 친해질 수 없었어요. 그는 두루마기를 잘 입고 다녔고 무슨 행사인지 행사가 있을 때는 목에다 태극기를 감아가지고 다녔어요. 뭔가 접근하기 힘드는 지사풍의 풍모를 보여 주었어요.” 그 때 필자는 이경순에 비해 너무 어려 보였으므로 혹 가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유봉윤은 돈을 잘 버는 의사가 못되는지 우리를 중국집으로 데리고 가 대접을 하는 것이었다.

이경순의 시는 난해했다. 첫인상은 1930년대 김기림풍으로 보였고 기상대라든가 폭풍이라든가 아메바라든가 하는 문명 비판적인 냄새가 물씬 풍겼다. 이경순은 광복후부터 ‘등불’ 동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질정하지 못하는 정서의 불균형이 행동 곳곳에서 드러났다. 그가 가는 술자리에서는 곧바로 술상이 뒤집혀졌고 술잔이 날랐다. 학사지도차 농업학교를 방문했던 장학사를 구석으로 끌고 가 린치를 하고, 출근하고는 수업이 빌 때는 밖으로 나가 거나하게 취했다. 직원 종례를 하는데 뒤늦게 들어온 이경순은 갑자기 “백구야, 뭐할라쿠노, 너 잡을란다” 는 노래를 길게 뽑으며 춤을 걸죽히 추었다. 이때의 정황을 증언했던 교육계의 원로들은 다 고인이 되었다.그 어우름이겠지만 이경순은 치과의사를 포기하고 주요기구와 기본 도서를 치과 개원을 하는 이영달 박사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경순의 광복후의 정서는 이런 것이었다. 무엇이 그를 몰아 낮밤 가리지 않고 술을 마시게 하는 것이었을까? 그리고 그를 동키호테라는 이름의 호인 ‘동기(東騎)’라 하게 하고 작품속의 주인공처럼 개그가 되게 했을까? 아나키스트는 아나키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는 사회현상을 두고 이런 식의 자가 상처로 허무를 표현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필자가 만났던 1960년대 후반의 이경순은 이런 역사의 상처들이 적어도 외상으로는 말끔히 치유되어 있었다. 안의에서 광복기와 그 이후를 살았던 이진언은 어찌하고 살았던 것일까?
경남일보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