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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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일보
  • 승인 2013.04.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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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경남의 아나키즘 운동과 이진언 시집 (하)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48)
<9>경남의 아나키즘 운동과 이진언 시집 (하) 
 
 
경남의 아나키즘 운동의 한쪽 각은 안의 출신 박노석(본명 박영환, 1913~1995) 시인이다. 그는 안의에서 태어나 부산, 함양, 진주, 양산에서 거주하면서 평생을 유유자적, 시와 술, 춤으로서 일생을 보냈다. 그가 아나키즘에  기울어진 것은 안의의 죽마고우 하기락의 영향이었던 것으로 보이고 또래 동아리 ‘죽림6인클럽’을 조직하고 소인극을 준비하다가 일제 경찰에 의해 좌절되기도 했다. 그는 일제말 반제 비밀결사인 조선노동청년동맹에 가담했고 1946년 부산에서 열린 경남북 무정부주의자대회에서 의장으로 피선되었고 이때 진주의 이경순을 만났다. 그 자리에는 이후 공부를 같이하는 일영 홍두표도 있었다.

필자가 1960년대 말 진주로 와 진주문협 사무국장을 하면서 박노석을 만났는데 이때는 이경순에게서 보였던 아나키즘의 편모를 어떤 구석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정진업과 짝이 되어 개천예술제에 꼬박 꼬박 참여하고 문학보다는 멋과 술과 문학행사 후속행사 잔치를 주도하는 인사로 매겨져 있었다. 예술제 전야제가 있는 바로 그날 오후 4시가 되면 청하지 않았는데도 지금 문화원 자리 풍천여관 7호실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약속한 듯이 박노석 정진업 두 시인은 유니폼처럼 바바리를 걸치고 베레모를 쓰고 여관을 나서서 진주 우체국 옆으로 평화호텔을 지나 시가행진하듯이 걸어서 청동다방이나 마돈나다방에 들어가는 것이 일정이었다. 이때는 개천예술제 시가행진이 본행사라면 이들 시인 두 사람의 퍼레이드가 전야제 행사라 할 만했다. 이 두 분을 잘 대동하는 업무가 진주문인협회 사무국장의 첫 번째 임무였다. 필자는 전임 사무국장 김석규 시인이 했던 대로 탈없이 업무를 소화했다.

박노석이 30여년을 개근하면서 개천예술제에 참여했는데 이는 설창수와의 인연에 의한 연례행사였던 셈이다. 그는 춤꾼이었는데 기생들이 소리를 하면 전문 춤사위로 폭넓은 시야로 춤추었다. 같이 다녔던 정진업은 테너 가수였다. 경남의 성악계가 일반화되지 않았을 때 정진업은 가창의 진수를 보여 주었다. 필자는 그의 성량에 압도되어 한없는 콤플렉스를 안아야 했다. 말하자면 젊은 시절의 아나키즘은 중년 이후가 되면서 자체 내면으로 허물어져 가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었던 셈이다.

이진언의 경우는 이경순의 데카당과 관련이 있는 듯한 자포자기형 행동이나 박노석의 미학주의와 같은 한량풍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삼남 이동원이 “아버지는 천성이 조용하고 행동 같은 것도 조심했던 분이어서 특별한 이야기가 없다”고 증언한 대로 울분이나 비탄 같은 시대적인 문제도 혼자 속을 끓이며 살았던 것 같다. 1946년 단주 유림(柳林, 1898-1961) 주도로 창당을 본 독립노농당의 초대 문교부장을 지낸 사실도 후에 단주 유림선생기념사업회에서 알려주어 알았다고 이동원은 말하고 있어 이진언이 이런 활동에 대해 식구들에게 이야기해 주는 체질이 아니었던 듯싶다. 여기서 잠시 유림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를 느낀다. 유림은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고 광복후 아나키즘 단체를 정당으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1961년 유림이 별세했을 때 심산 김창숙은 “그대 있어 나라가 무겁더니 그대 떠나니 이 나라가 비었구나”라는 추도사를 하며 슬퍼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진언의 시집 ‘우수의 행정’은 경남 출신 시인이 낸 첫 번째 시집이었다. 지상에 이 시집이 세권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국회도서관 소장본은 ‘단주 유림선생기념사업회’ 회장 김영천의 노력으로 발굴되었고 고대도서관에는 목록만 있고 정작 자료는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종의 씨가리란 하는 수 없는 게야/ 저년 제 에미도 그렇더니만/ 좀더 심할 때는 뺨-/ 아아 무서운 매-// 중략//달 밝은 때나/ 누내리는 밤엔, 축축한 부엌 앞에/ 외로이 앉아/ 웨-나는 웨-나는 이러한/ 신세에 태어났느냐고,/ 말 못하는/ 개의게 무를 때면/ 나도 몰르게/ 나는 줄도 몰르게/ 하욤없이 눈물만/ 구비 구비.” (‘어린 노예의 섫음’ 전문)

인용시는 어린 노예의 슬픔을 표현하고 있는데 일제하의 노예는 지배를 받고 있었던 민족이라고 볼 때 시대적인 이야기로 의미를 넓혀 놓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런 시는 아나키즘의 고유한 시각은 아니다. 20년대 이후 경향파들의 의식이나 공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아나키스트 시인들에 대한 연구는 폭넓게 진행되어야 할 시점에 와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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