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일보의 천기 엿보기] 세종대왕 태실(태봉)지 (上)
[경남일보의 천기 엿보기] 세종대왕 태실(태봉)지 (上)
  • 정영효/이웅재
  • 승인 2013.05.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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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태실지, 전국서 찾아내는 명당 중 명당
세종대왕 석물
세종대왕 태실지에서 쫓겨난 석물들이 태봉 중턱에 보관돼 있다.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사람이 태어나면 몸에서 태(胎)를 잘라내는데 이 태를 내다버리지 않고 항아리 등을 이용해 땅에 정성스럽게 묻어두는 풍습이 있었다. 태를 묻어 둔 곳을 태실지, 태실이 묻어져 있는 봉우리를 태봉(胎峰)이라고 한다. 특히 왕의 태실은 즉위하는 그 해에 만들어졌는데, 왕의 치세는 태실에서 시작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왕의 태를 묻을 장소를 찾을 때 ‘태실도감’을 설치해 전국의 길지를 찾았으며, 여러 군데 길지 중에 왕이 직접 선택했다. 심지어 왕이나 왕자 등 왕실 자손들의 태를 묻는 곳에 민묘가 있는 경우 왕이 직접 그 민묘를 즉시 이장하라는 어명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최고권력자였던 왕이 자신이나 자손들의 태를 중시했음을 입증하는 사례다. 그래서 왕의 태실지는 길지 중에 길지, 명당 중에 명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편집자 주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산27번지 소곡산에 위치하고 있는 세종대왕(世宗大王) 태실지(胎室地). 세종대왕 태실을 찾아 소곡산으로 향했다. 왕의 태실이 있는 곳인지 세종대왕 태실지로 가는 길목 마다 주변 산은 물론 들판에는 화려하게 치장된 묘소와 비석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었다. 우리나라 전역이 명당 내지는 길지가 아닌 곳이 없지만 세종대왕 태실지로 가는 길목에 화려하게 조성돼 있는 묘소들이 유달리 많았다. 이는 세종대왕 태실지는 물론 주변도 길지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세종대왕 태실 이전

세종대왕(1397~1450년, 재위 1418~1450년)은 조선 제4대 국왕이다.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휘는 도, 자는 원정(元 正)이다. 1413년 5월 16세 때 충녕대군(忠寧大君)에 봉해졌다가 1418년 6 월 22세에 왕세자로 책봉되고, 1418년 음력 8월 10일 태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왕에 즉위했다.

세종대왕의 태실지는 즉위년에 원태실지에서 현 위치인 사천시 곤명면 태봉(소곡산)으로 옮겨 온 것으로 기록돼 있다. ‘세종실록’에는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 정이오(鄭以吾)가 진양(晉陽)으로부터 와서 태실산도(胎室山圖)를 바치니, 그 산은 진주의 속 곤명(昆明)에 있는 것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또 “태실(胎室)에 돌난간(石欄干)을 설치하면서 땅을 파서 지맥(地脈)을 손상시켰으니, 지금 진주(晉州)의 태실에는 돌난간을 설치하지 말고, 다만 나무를 사용하여 난간을 만들었다가 썩거든 이를 고쳐 다시 만들 것이다.이를 일정한 법식으로 삼을 것이다”고 기록돼 있다. 이 기록에서 세종 원태실지는 돌난간 때문에 지맥이 손상돼 있었으며, 곤명으로 옮겨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원태실지에 대한 기록은 없어 어느 곳에서 옮겨왔는지는 알 수 없다.
세종대왕 태실
세종대왕 태실과 관련된 내용들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판
태실 안내판
세종대왕 태실 안내판
 

◇세종대왕 태실의 수난

세종대왕은 우리나라 역대 왕조, 역대 왕 중에서 가장 업적을 많이 남긴 최고의 성군이다. 그럼에도 세종대왕 태실지는 파손·훼손은 물론, 강제로 이전되고, 빼앗기는 등 수난의 연속이었다. 지금도 태가 묻혔던 명당 자리는 후손들에게 빼앗기고, 석물 마저도 원래의 자리에서 쫓겨난 채 그 존재감마저 알리지 못하고 있었다. ‘사천 세종대왕 태실지’라는 안내판이 없었다면 과연 이곳이 세종대왕의 태가 묻어져 있던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황량했다. 세종대왕은 파손 등으로 수차례에 걸친 개보수에도 자리 만큼은 차지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후손들의 몰상식으로 쫓겨나 있어 모두가 반성해야 할 일이다.

세종대왕 태실지였던 태봉 정상에는 지금 민묘(民墓)가 버젓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 있던 태실비와 태항아리를 안장하는 중동석(中童石), 상개연엽석(上蓋蓮葉石), 돌난간, 지대석, 주춧돌, 팔각대 등 당시의 조형유물은 봉우리에서 약 50m 떨어진 산 왼쪽 동편기슭 턱에 한군데 모아져 있다. 경남지방기념물 제30호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으나, 국가 차원에서 원형 복원이 시급한 시점이다.

특히 세종대왕 태실은 일본에 의한 수난이 심했다. 즉위 원년에 이봉된 태실은 174년이 지난 임진왜란 때 왜구에 의해 파손되는 첫 수모를 겪는다. 선조 34년(1601년)의 ‘세종대왕 태실 석난간 수개 의궤(世宗大王胎室石欄干修改儀軌)’에 따르면 ‘태실 외면의 석난간은 모두 훼손되었고, 석주는 8개 중 2개가 깨어지고, 부석과 연엽석, 중동석은 흩어져 있고, 개석은 뽑혀졌다’고 기록돼 있다. 즉 훼손된 부분이 석난간만 아니라 모든 부분이 파손된 것이다. 또 태실 수개는 예조에서 담당했지만 당시 이 일(손상)이 매우 중대하여 여러 대신들과 의논하였다고 기록돼 있는 점을 감안하면 세종대왕 태실의 훼손이 매우 심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기록상으로는 세종대왕 태실에 이상이 생겨 3번에 걸쳐 고쳐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천문화원이 발간한 ‘세종대왕 단종대왕 태실의궤’에 따르면 1601년의 ‘세종대왕 석난간 수개의궤’와 1730년의 ‘세종대와 단종대왕 태실 수개의궤’, 1734년의 ‘세종대왕 단종대왕 태실 표석 수립시 의궤’의 기록물이 전해지고 있다. 세종대왕 태실은 임진왜란 때 왜구에 의해 훼손된 후 선조 34년(1601)3월에 첫 중수됐으며, 영조 6년(1730년)에 고쳐졌고, 영조10년(1734)에는 태실비(胎室碑)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세워진 태실비는 지금 태봉 기슭 턱에 보존돼 있다. 이 태실비에는 앞면에 세종대왕태실(世宗大王胎室), 후면에는 숭정기원후일백칠년갑인구월초오일건(崇禎 紀元後一百七年甲寅九月初五日建)라고 새겨져 있어 영조10년(1734)에 중수된 태실비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리고 세종대왕 태실은 나라를 빼앗긴 일제시대에도 훼손되는 수모를 겪었다. 1929년경 일제는 조선왕조의 맥을 끊고, 우리나라를 완전히 식민화하기 위해 세종대왕 태실에 있던 태항아리를 서삼릉으로 강제 이전시키는 만행을 자행했다. 이 때문에 세종대왕의 태실은 자기 자리를 빼앗긴 채 여기저기 흩어져 떠도는 신세를 면치못하고 있다.
세종대왕 태실 안내판
세종대왕 태실 안내판. 뒤쪽에 세종대왕 태실비가 보인다.

◇세종대왕의 풍수적 관심도

조선시대에는 풍수사상이 어느 시대 보다 성행했고, 중요시했던 시대였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 역대 왕 뿐 만아니라, 양반계층은 물론 중인계층, 심지어 천민계층까지 풍수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왕의 태가 묻힐 태실지는 풍수를 더 엄격하게 적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국에서 길지 중에 길지를 찾아 왕의 태를 묻었을 것으로 보인다.

역대 왕 중에서도 세종대왕은 유독 풍수에 큰 관심을 보인 왕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태실의 일에는 지대한 관심을 보인 왕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천문화원이 2000년 11월 발간한 ‘세종대왕·단종대왕 태실의궤’에 따르면 세종대왕은 재위 26년에 “‘태실은 마땅히 높고 정결한 곳이어야 한다’며 경북 성주에 자손들의 태실을 정했을 때 태실 옆에 민묘인 이장경의 무덤이 있다 하여 즉시 옮기라는 어명을 내린 일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같은 기록들을 보면 세종대왕은 자신의 태가 묻혀지는 태실지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를 미루어 보면 세종대왕은 자신의 태를 풍수상 전국에서도 명당 중에 명당에 묻었을 것으로 보인다.

세종대왕 태실지 주변 민묘들
세종대왕 태실지 주변 민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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