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일보의 천기 엿보기] 세종대왕 태실(태봉)지 (下)
[경남일보의 천기 엿보기] 세종대왕 태실(태봉)지 (下)
  • 정영효/이웅재
  • 승인 2013.05.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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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팎으로 생기 품어주는 생룡 형국의 길지
단종대왕 태실에서 바라 본 세종대왕 태봉
단종대왕 태실에서 바라 본 세종대왕 태봉
 
망국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소곡산 세종대왕 태실지는 풍수적으로 길지였음이 역사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일제는 조선 왕실의 태실지가 길지(吉地)에 있다는 것을 알고 1929년 조선왕조의 정기를 끊기 위해 전국에 흩어져 있던 조선왕실의 태실들을 강제로 옮기고, 태실이 있던 땅도 민간인들에게 파는 만행을 자행했다.

이 때 세종대왕의 태항아리는 서삼릉으로 이전했으며, 태실지도 민간인에게 팔렸다. 이 때문에 현재 세종대왕의 태실터에는 민간인의 무덤이 들어섰으며, 태실비와 태실석물 일부만이 한데 원래 있던 자리에서 쫓겨나 태봉 중턱에 모아져 보호되고 있을 뿐이다. 민묘에 그 자리를 빼앗긴 세종대왕 태실지는 산세와 지세, 수세 등 풍수적으로 명당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길지의 역사적 기록

조선왕조는 왕은 물론 왕의 자손의 태가 묻힐 태실지에 대해 찾아내는 일뿐만 아니라 태를 묻는 절차와 이후 관리에도 매우 엄격했음을 알 수 있는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를 미루어 보면 왕의 태실지는 왕조 차원에서 전국에서 제일의 길지를 찾은 후 길일을 택해 엄격한 격식에 따라 태를 묻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이후 관리도 엄격했다. 군사를 두어 태실지를 지키게 했으며, 태실지를 훼손한 자는 물론 그 책임자 나아가 해당지역의 수령까지 엄벌에 처했다. 조선왕조실록 곳곳에 태실을 매우 중요시했음을 알리는 기록들이 발견된다.

사천문화원에서 2000년 발간한 ‘세종대왕 단종대왕 태실의궤’에 따르면 조선왕조실록 세종 18년 8월 8일 기록에는 “음양학을 하는 정앙이 글을 올리기를 ‘사람이 나는 시초에는 태로 인하여 자라게 되는 것이며, 더욱이 그 어질고 어리석음과 성하고 쇠함이 모두 태와 관계있다.-중략-. 남자의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벼슬이 높으며, 병이 없을 것이요, 여자의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얼굴이 예쁘고, 단정하여 남에게 흠앙을 받게 되는데 다만 태를 간수함에는 묻는데 도수(度數)를 지나치지 않아야만 좋은 상서(祥瑞)를 얻게 된다. 그 좋은 땅이란 것은 땅이 반듯하고 우뚝 솟아 위로 공중을 받치는 듯 하여야만 길지(吉地)가 된다. -중략-. 태를 간수하는 법에 의거하여 길지를 가려서 이를 잘 묻어 미리 수(壽)와 복(福)을 기르게 하소서’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대왕 안내판
세종대왕 태실임을 알리는 안내판
 

또 조선왕조실록 문종 즉위년 9월 8일에도 풍수학에서 아뢰기를 “사람이 날 때는 태로 인하여 장성하게 되는데 하물며 그 현우(賢愚)와 성쇠(盛衰)가 모두 태에 매여 있으니 태란 것은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략-. 남자가 만약 좋은 땅을 만난다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고, 구경에 정통하며, 단상(團爽)하여, 병이 없으며, 관직이 높은 곳으로 승지되는 것입니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미루어 보면 세종대왕의 태가 묻힌 장소는 전국에서 길지였음은 불문가지이다. 세종대왕 태실을 사천 곤명으로 정한 기록을 보면 왕조실록 세종 즉위년 8월 14일에는 예조에서 “이제 장차 길한 때를 가리어 태를 봉할 것이오니 전례에 따라 태실도감을 설치하여 길지를 택하도록 윤허해 줄 것”을 아뢰었다는 기록이, 보름 후인 8월 29일에는 “태실증고사에 전 대제학 정이오를 삼았다”는 기록이, 두달 후인 10월 25일에는 “태실증고사 정이오가 진양(晉陽)으로부터 와서 태실산도(胎室山圖)를 바치니, 그 산은 진주의 속현 곤명(昆明)에 있는 것이었다”는 기록 등이 있다.

또 그해 11월 1일에는 “태실도감에서 진주의 태실에 시위하는 품관 8인과 수호 8인을 두기를 청했다”다는 기록이, 이틀 뒤인 11월 3일에는 “태실도감제조 김자지에게 동옷과 모관, 신을 내려주었다”는 기록과 같은날 “태실에 돌난간을 설치하면서 땅을 파서 지맥을 손상시켰으니, 지금 진주의 태실에는 돌난간을 설치하지 말고, 다만 나무를 사용하여 난간을 만들 것을 명령하는 전교를 내렸다”고 기록돼 있다.

그리고 이틀 뒤 11월 5일에는 예조에서 “‘태실을 진주로 옮겨 봉안할 때에, 태를 모시는 곳에는 채붕을 짓고 나희를 베풀게 하며, 그 지나가는 주, 현에는 다만 관문에만 채색 누각을 짓고, 의장과 고악을 갖추며 교외에서 맞이하고, 각 도의 감사와 수령은 자기의 관내를 넘어서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고하니 세종이 그 말에 따랐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 세종편에 실려 있다. 왕실에서는 세종대왕 태를 원태실에서 이봉하기 위해 좋은 땅을 찾아 나섰으며, 길지를 찾은 후에도 엄격한 격식과 절차를 거쳐 이봉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세종대왕 태실지가 소재하고 있는 태봉(소곡산)은 음양학과 풍수학에서 말하는 좋은 땅이라는데에도 부합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형세

세종대왕 태봉(소곡산)은 생룡의 기세에 좌청룡 우백호가 감싸안으면서 호위하고 있는 아늑한 형상하고 있는 풍수를 갖고 있다고 풍수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세종대왕 태봉(胎峰)의 태조산(太祖山)은 지리산(1915m), 중조산(中祖山)은 방화고지(665.8m), 소조산(小祖山)은 228m, 주산(主山)은 151.3m봉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동방대학원대학교 풍수지리학을 전공한 박대윤씨가 2010년 제출한 ‘조선시대 국왕태봉의 풍수적 특성연구(朝鮮時代 國王胎峰의 風水的 特性 硏究)’라는 박사 논문에 따르면 세종대왕 태봉의 내룡맥은 백두대간에서 낙남정맥이 시작되는 지리산(1915m)에서 영신봉(1652m)과 삼신봉(1289m)을 차례로 기봉(起峰)한다. 삼신봉에서 길마재를 넘어 칠중대고지(565.2m)→방화고지(665.8m)→돌고지재→546m봉→천황봉을 차례로 기봉하면서 배토재를 지나 228m에서 나누어(分擘)진다. 228m에서 우측으로 뻗은 맥(右出脈)은 본국의 백호(白虎)와 안산(案 山)을 만들고 있다. 왼쪽으로 뻗은 맥(左出脈)은 224m봉과 225.8봉m을 기봉한 후 옥동마을 뒤 봉우리에서 다시 나누어(分擘)진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뻗은 맥(右出脈)은 단종 태실지라고 표시된 작은 태봉산으로 진행하고, 왼쪽으로 뻗은 맥(左出脈) 은 166.5m과 151m을 차례로 기한 후 151.3m을 입체로 기봉하고 있다. 주산에서 좌·우 변화(之玄)와 상·하 기복(起伏)을 거쳐 결인속기(結咽束氣)한 후 기세 왕성한 비룡으로 돌봉에 취기(聚氣)입수한 곳이 바로 이곳 태봉산(118m·소곡산)이다고 기술하고 있다. 즉 태봉의 내룡맥은 주산에서 왕성한 기세로 뻗은 생룡 형국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내청룡과 내백호가 단축돼 혈장 앞까지 감싸지 못하고 있는 단점을 외청룡과 외백호가 보강하고 있는 형세다. 외청룡과 외백호가 생기가 흩어지지 않도록 하는 장풍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세를 보면 우측 골짜기에서 발원한 백호수가 외백호수와 합수하여 혈장을 오른쪽으로 돌아나가고, 이 물은 내룡맥 끝 부분 명당에 모인다. 좌측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온 청룡수 역시 명당에 합수한다. 명당의 합수물은 오른쪽으로 돌아 흐르면서 완사천으로 나가고 있다. 박대윤씨는 “태봉의 수세는 백호수와 청룡수의 양수(兩水)가 명당들에서 합수하다가 출수하고 있으므로 매우 길(吉)하다고 본다”고 논문에서 기술하고 있다.

세종대왕 태봉 수로
세종대왕 태봉 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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