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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살이 같은 축구, 그래서 뛴다<경남축구열전> '불세출의 미드필더' 박상인 감독
박성민  |  smworld17@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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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5.16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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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인 감독.
 
올해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은 독일팀들의 매치업으로 결정났다.

세계 축구계는 바르셀로나와 레알마드리드의 시대가 저물고 분데스리가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직감하고 있다. 손흥민과 구차철, 지동원 등 한국선수들도 독일리그를 누비며 한국축구의 위상을 세계에 떨치고 있다. 차범근 해외진출의 신호탄을 쏜 그때 해외진출를 모색했던 또 한명 선수가 우리 곁에 있다.

박상인. 70년대 국가대표 출신으로 75년 한일 정기전과 77년 월드컵 아시아지역예선에서 벼락 같은 결승골로 우리를 즐겁게 했던 불세출의 미드필더.

모교를 거쳐 내셔널리그의 사령탑으로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는 그를 훈련이 한창인 대저차량기지 운동장에서 직접 만났다.



◇시골소년의 남다른 재능

소년은 가슴에 벌을 달고 그라운들 누비는 동래고 축구 선수들이 부러웠다. 그러나 그의 고향 창녕에선 제대로 된 축구부가 없었다.

그는 창녕 영산중학교 재학시절 특활시간의 일환으로 아마추어 축구부 활동을 하며 축구의 대한 갈증을 풀어냈다. 일주일 한 번 정도 공을 차던 소년은 군내 중학 축구대회에서 첫 우승을 맛본다. 이를 계기로 참가한 도내 대회 1차전에서 정식 축구부인 삼천포중학교에게 1-3으로 패배했다. 패배의 쓴잔을 처음 경험한 소년에게 일생 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다.

공교롭게도 창녕중학교에 정식 축구부가 창설된 것이다. 창녕군은 군내 4개 중학교에서 소질 있는 학생들을 뽑아 정식 축구부로 출범했다. 어릴 때부터 남다른 소질을 보였던 그가 축구부에 뽑힌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내가 그 때부터 정식으로 축구를 했다고 할 수 있지. 그 해 부산대학총창배 전국대회가 있었던데 회동중학교를 꺾고 우승을 했지 모야. 그러면서 동래고로 스카우트 된 거 같아”

축구 명문 동래고로 진학한 박상인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울 대신고와 가진 결승전에서 2골을 넣는 맹활약을 펼치며 전국대회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한다. 당시 청소년 국가대표가 즐비했던 동래고의 위상에 비교할 때 매우 이례적인 수상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의 주가는 하늘을 찔렀다. 전국 랭킹 5위권에 들 정도로 연·고대 등 축구 명문대의 스카우트 전쟁이 일어났다. “그 때 대학으로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감독 선생님이 실업팀으로 가라고 하셔서 두 말 않고 상업은행팀으로 갔지. 지금 생각하면 조금 아쉬움 생각도 있어”

실업팀으로 둥지를 옮긴 박상인은 육군 팀에 들어가서도 전국체전, 대통령배 등 전국대회 3관왕을 휩쓸며 자연스럽게 국가대표로 발탁됐다. “그 때는 대표팀 절반이 경남출신이었지. 김호곤 선배, 강병찬 선배, 이차만 선배, 박병철, 유건수, 박창선, 조광래, 박성화 등 정말 많았지”



◇ 세계 최고 리그에 도전하다

국가대표로 명성을 날리던 박상인은 1980년 29살 때 독일 진출을 모색한다.

한 신문사 기자의 권유로 추진한 해외진출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애초 그가 계약하기로 한 팀은 송종국이 몸담았던 페예노르트였다. 아약스, 아인트호벤과 네덜란드 3대 클럽으로 불리는 페예노르트와 계약 직전에서 네덜란드 선수협의회와 감독 간의 갈등으로 그의 이적이 무산되고 말았다. “선수 하나가 감독과 불화가 있었는데 그 선수가 선수협회 부위원장이었지. 외국인 선수가 2명이 있는데 늘어나는 것에 불만이 있었던 거지 그래서 독일로 눈을 돌렸지” 결국 그는 독일 뒤스부르크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는 뒤스부르크 입단을 위해 테스트를 받는 일주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 때 제대로 된 훈련 비디오가 있지도 않았고 한국선수가 알려지지도 않았지, 쉽지 않더라고 그래서 정말 죽기살기로 뛰었어” 박상인은 당시 세계 최정상의 선수들이 모인 분데스리가에 당당히 입단하며 차범근에 이어 독일 진출 2호 선수가 됐다.

하지만 그의 독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구단과 교민들의 기대를 받던 박상인은 데뷔 전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첫 경기를 차범근 선수가 있는 프랑크푸르트와 하는데 지역에서 크게 홍보도하고 분위기 조성에 나섰지. 당시 파독 광부분들과 간호사분들이 기대가 많았는데 경기 전날 부상을 당하고 말았지” 햄스트링 부상을 당한 박상인은 독일에서 8경기를 뛰며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한국대표팀과 뒤스부르크의 경기도 박상인의 부상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 선수·감독으로 이룬 30여 차례 우승

독일에서 2년간 선수생활을 보낸 박상인은 83년 국낸 슈퍼리그가 출범하자 한국으로 돌아온다.

할렐루야 축구단과 현대 호랑이 축구단을 거친 그는 87년 현역에서 물러나 모교인 동래고 감독으로 취임한다. “원래는 서울에서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지인의 소개로 부산에 갈 일이 있었어. 그런데 부산에서 식사를 가진 자리에서 후원회장님, 교장 선생님 다 계시더라고 참석한 자리가 결국 감독직을 수락하는 자리가 됐지” 모교의 지휘봉을 잡은 박 감독은 축구 명문의 명성을 여전히 이어갔다.

2006년 창단된 부산교통공사 사령탑에 앉은 박 감독은 여전히 넘치는 열정으로 전국체전 우승과 내셔널 리그 제패를 이뤄냈다. “중·고교 육군팀 통틀어 25~30회 가량 우승 한 것 같아. 나만큼 우승복 많은 사람이 또 있을 까 싶어. 박스컵, 킹스컵 ,메르데카컵 등 아시아 3관왕도 했으니까 말이야 ”

박 감독은 아들 2명과 함께 뛰는 교통공사팀의 각별한 애정도 드러냈다.

“내가 창단 때부터 지도도 했고 다들 은퇴하고 놀고있던 선수, 대학 졸업 후 갈 때가 없는 선수, 나이 때문에 밀려난 선수들이 함께 한 팀이야. 그런 선수들이 기적을 만든 거지” “내 아들 2명도 같이 뛰고 있지만 똑같은 선수라고 생각해. 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면도 있겠지만 둘 다 팀으로선 없어서는 안 될 선수들이지” 박 감독은 우세한 경기에도 1-0으로 패한 목포시청과 경기를 복기하며 다음경기 각오를 드러냈다.

“나는 우리 선수들을 믿어. 우리는 5연승도 한 팀이기 때문에 금방 3연승만 하면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갈 수 있는 힘이 있어”

끝으로 박 감독은 “정말 축구는 인생살이와 같아. 조금만 되겠지 하고 느슨하게 굴면 금방 떨어지게 돼.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해” 라며 자신의 축구철학을 밝혔다.



박상인은

출생= 1952년 11월 15일 경남 창녕

학교= 창녕중-동래고

선수경력= 국가대표(1974~1980), 독일 뒤스부르크(1980~1982), 할렐루야(1983~1985), 현대호랑이 프로축구단 (1986~1987)

지도자경력= 동래고 감독(1987~2001), 청소년국가대표 감독(1992),부산교통공사 감독 (2006~)


박성민기자 smworld17@gnnews.co.kr



h130506-박상인감독 인터뷰01
(인터뷰)=박상인감독

기사=박성민기자
황선필기자 feel@gnnews.co.kr
h130506-박상인감독 인터뷰01
(인터뷰)=박상인감독

기사=박성민기자
황선필기자 feel@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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