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다리 보니, 이 큰 바위을 어찌 데려왔을까
쌀다리 보니, 이 큰 바위을 어찌 데려왔을까
  • 경남일보
  • 승인 2013.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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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거창 석가여래불 입상을 찾아가며

용원정과 쌀다리

용원정과 쌀다리.

 
봄꽃들이 사방천지의 산하를 현란한 무도장인양 상춘객들을 황홀경으로 홀려서 넋이 빠지게 한바탕 휘젓고는 분 냄새만 여운처럼 남겨놓고 간다온다 말도 없이 흔적 없이 가버렸다. 모닥모닥 둘러앉은 철쭉들의 도란거림에 한참만에야 정신을 차린 온갖 새잎들이 연두색을 우려내고 녹색의 푸름으로 물들고 있어,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도 저마다의 의미를 되찾으며 솔직한 소리를 내는데 가식도 허식도 없이 가림도 없고 막음도 없는 탁 트인 세계가 어딘가를 몰라서 비 가림도 없고 볕 가림도 없이 바람 불면 바람 맞고 비오면 비 맞으며 찬 서리에 젖고 밤이슬에 젖으며 달빛에 물이든 채 별을 보고 밤을 새며 천년세월을 마다 않고 지켜온 거창의 양평리와 상림리의 석불입상을 찾아 길을 나섰다.

길손의 맛은 유유자적이고 홀가분한 차림새는 그의 멋이지만 진정 탐하는 것은 순리를 터득하며 이치를 깨우치려함이 아니던가? 그래서 35번 고속도로 지곡IC를 빠져나와 가는 길에 용원정과 건계정도 들릴 요량으로 안의면 소재지를 가로 질러 남강천을 굽어보는 광풍루를 스쳐지나 금천교차로에서 거창방향으로 좌회전을 하여 3번 국도를 따라 차를 몰았다.

이내 또 좌회전을 하면 비경의 유혹에 빠져 벗어나지 못하는 화림동계곡이다.

거연정 씻긴 물이 군자정을 감돌아서

차일암을 얼싸안고 동호정에 노닐다가

월연담에 품은 달을 농월정이 희롱하네.

물 좋고 반석 좋아 정자까지 즐비하여 17회에 글을 연재했던 팔정팔담의 화림동계곡이다. 불에 탄 자리에 농월정이 다시서고 명월이 만공산하면 쉬었다가 가마하고 소매 끝을 잡아끄는 육십령 가는 길의 황석산을 뿌리치고 직진을 하면서 용추계곡도 후일을 기약하고 왕복4차선 도로를 마다하고 2차선 구 도로로 내려서서 굽이진 산길을 휘젓고 달렸다.
 

상림리 석조관음보살입상.jpg3

상림리 석조관음보살입상.



3번국도의 옛길은 후미진 골짜기마다 옹기종기하게 모닥모닥 자리 잡은 작은 촌락과 굽이마다 끊어질듯 이어져가는 길 모롱이하며, 협곡처럼 깊숙하게 내려앉아 바위틈을 감고 도는 물빛 맑은 도랑이며, 산기슭에도 그렇고 논두렁 밭두렁 할 것 없이 우람한 바윗돌이 제마다의 기기묘묘한 형상으로 엎어지고 자빠지고 불거지고 솟구쳐서 제멋대로이고, 허리 굽고 등이 굽어 멀찍멀찍 떨어진 채 독야청청 노송들이 기암괴석 벗을 삼고 굽이굽이 폭을 지워 병풍처럼 둘러쳐진 멋스러운 길이다. 여기에 해발1300여m의 기백산에서 흘러내려와 고학마을 거쳐 마리천을 이루는 계곡 옆으로 아름드리 벚꽃나무로 볕 가림을 하고 고즈넉이 내려앉은 2층 누각의 용원정이 고색창연한 한 폭의 그림이다. 옆으로의 효열각은 화려한 단청의 정려비각인데 해주 오씨의 효자비와 청주 한씨의 효열부비가 나란하게 모셔졌다. 그 옛날 신작로가 뚫리기 전까지는 마을 초입의 들머리길이었으나 지금은 용원정으로만 이어지는 돌다리는 커다란 바윗돌 하나를 계곡 가운데에 길게 세워서 교각으로 삼고 양쪽으로 각각 하나의 돌을 다듬어서 마주 걸친 돌다리인데 돌 하나의 크기가 엄청나다. 1758년 이 마을의 오성재·성화 두형제가 쌀 일 천석을 드려서 놓았다 하여 “쌀다리”로 불리어 진다는데 석질로 보아 이 고장의 돌은 아닌 것 같은데 운반과 설치를 어떻게 했었는지 옛사람들의 솜씨와 지혜가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마리면 삼거리를 지나 위천천을 따라 굽이진 길을 한참 가다보면 좌우로의 산은 더욱 높아지고 강폭이 넓어지는 모롱이를 돌면 야트막한 수중보가 가로 놓여 심산유곡의 청정호수를 연상시키는데 보 아래의 건너편 바닥은 거대한 반석을 널따랗게 깔았고 벼랑위로는 날아갈듯 날렵한 2층 누각의 건계정이 그림 같이 앉았다.

강가의 길섶에 마련된 작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임란을 피하여 의주 몽진길에 선조를 등에 업고 십리길을 내달려서 화를 피하게 한 장만리 충신정려각 옆으로 새로 놓은 다리를 건너서 건계정을 찾았다.

하나의 바위를 주춧돌로 삼아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인 건계정은 거창장씨의 시조충헌공 장종형의 후손들이 선조를 기리며 주변의 풍광을 감상하기 위해 1905년에 건립한 정자란다. 누마루에 올라서니 전경이 장관이다. 학동연운구절승(鶴洞煙雲區絶勝)이라는 주련의 글귀대로 학동의 연기구름이 지역 절승이라 했듯이 떠가는 구름조차 풍광의 멋을 더하는 절경이다.

다시 차를 몰아 물길을 따라 잠시 내려오다가 다리를 건너서 표지판이 일러주는 대로 십분 안팎의 거리인 상림리 석조관음입상을 찾았다. 찻길에서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는 커다란 석불입상이 서너 집 어우러진 골목길 끄트머리의 야산기슭 빈터에서 길손을 빤히 지켜보고 계셨다. 언뜻 보기에는 커다란 상투에 각이 진 얼굴과 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이며 헌칠한 키에 허리띠까지 두르고 있는데다 거무스레한 화강석의 단단한 느낌마저 들어 장군상을 방불케 한다. 그러나 팔각의 하대석 위로 연화좌대를 맨발로 밟고 서서 오른 손은 내린 채로 정병을 들었고 왼손은 가슴 밑으로 연꽃봉오리 한 줄기를 들었으며 구슬을 꿰어 매달은 목걸이를 늘어트리고 있어 관음보살임을 짐작할 수 있다. 안내판의 글씨는 빛이 바래져서 더듬거려지는데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3.5m인 장신의 관음보살입상으로서 보물 제378호란다. 관음입상을 중심으로 가장자리를 네모나게 석축으로 쌓아 말끔하게 가꾸었건만 옛 가람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고 외진 곳에 홀로서서 외롭기 그지없다.
 
건계정.jpg2
건계정.


천여년을 살아온 살림살이가 어쩌시다 비 가림도 못하고 향촉대도 하나 없단 말입니까?

그리도 융통성이 없어서야 또 천년은 어떻게 사시렵니까? 앞에 보이는 강물을 주야장천 지켜보시면서 오늘을 사는 법을 그리도 모르십니까? 강둑을 정비한답시고 태초의 세월을 머금고 역사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자연석은 걷어가고 채석장의 천덕꾸러기인 희끗희끗한 발파석을 쌓는 까닭도 아시지 않습니까? 산과 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강이고 바다까지 온통 공사판이 아닙니까? 해서는 안 될 것과 해야만 할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요 완급을 가릴 줄도 모르는 그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들이 바지런을 떠는 연유도 아시고 오만원권은 나오기만 하면 숨어버리는 까닭도 더 잘 아시면서 어쩌실 요량으로 사시마지 땟거리도 마련하지 못하고 계신단 말입니까? 미움도 고움도 가르지 말고, 많고 적음도 따지지 말자며 온갖 상념을 씻어 볼 요량으로 옷매무새를 다시 고치고 불전함이 없으니 눈치볼일도 없고 해서 실컷 절만하다가 소원을 비는 것도 잊어버리고 발길을 돌렸다.

양평리 석조여래불을 찾아 거창 읍내를 가로 질러서 종합운동장을 지나 가조면으로 가는 지방도로를 접어들자 안내판이 진작부터 길마중을 나와 있었다.

야트막한 산등성이의 비탈을 깎아서 나직하게 석축을 쌓아 꽤나 널따랗게 자리를 잡고 커다란 원반모양의 동그란 천개를 갓처럼 쓰고 있어 언뜻 팔공산의 갓바위를 연상케 하는데 어른 키의 곱절보다 큰 장신의 석가여래입상이다. 치렁치렁한 법의는 발등까지 덮었고 오른 손을 내려서 법의자락을 살포시 주름지게 잡았으며, 왼손은 엄지와 인지를 곧게 펴서 가슴에 붙였는데 부드러운 주름선이 바람결에도 일렁일 것만 같다. 통일신라시대의 입상으로서 보물 제377호란다. 사면의 각점에 동그란 주춧돌이 있어 조그만 한 전각이 있었나보다 했더니 부처의 도량을 늘 정갈하게 지켜 오신 비구니 준용스님이 이 석불이 대웅전의 본존불이었고 이를 모신 닫집의 주춧돌로 추정된다고 하시니 대웅전의 크기가 얼마나 웅장했을까가 가히 짐작되고 남음이 있다. 또 다른 연화좌대를 앞에 놓아 향로가 마련돼 있어 헌향삼배로 예를 갖추니 석가여래의 자비의 미소가 사바세계로 잔잔하게 흘러간다./시민기자

양평리 석조여래입상.jpg4

양평리 석조여래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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