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을관계' 뒤집어 생각하자
'갑을관계' 뒤집어 생각하자
  • 경남일보
  • 승인 2013.05.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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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근 (객원논설위원, 가야대학교 행정대학원장)
2년 전쯤이다. ‘자본주의 4.0’에 대한 논의가 국가적 이슈였다. 영국의 언론인 칼레츠키가 자신의 책 제목으로 붙인 이 용어는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처럼 받아들여졌다. 당시 청년실업 문제, 비정규직 차별문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문제, 양극화 문제가 우리 사회의 큰 갈등요인이었기 때문에 자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비전은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 탓이었는지 동반성장위원회라는 것도 출범했다. 때마침 마이클 샌델이 쓴 ‘정의란 무엇인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도 서점가에서 열풍이 불었다. 지난 대선 때는 여야가 ‘경제민주화’란 용어를 선점하기 위해 쟁탈전을 펼쳤다. 1% 갑의 횡포에 숨죽이고 있었던 99% 을의 입장에서는 듣기만 해도 위안이 되었다. 늘 부당하고 불편하고 불공평한 대접을 받아왔던 사람들이었기에 변화의 기대를 걸었지만 여전히 원점에서 맴돌고 있다.

지금도 우리 사회의 가장 큰 화두는 ‘갑을관계’다. 소위 라면 상무, 막말 우유사건으로 촉발되었지만 사회전반에 미치는 파장은 크게 일고 있다. 갑의 횡포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도를 넘었기 때문이다. 되돌아보면 2년 전부터 외쳐 왔던 ‘자본주의4.0, 동반성장, 경제민주화, 정의’는 화려한 말잔치에 불과했다. 온갖 이해관계에 얽히고설킨 세상살이가 말잔치로 풀릴 일은 애당초 아니었다. 이번 일을 두고 일부에서는 을의 반란이라고 말한다. 정부도, 정치인도, 언론도 하지 못한 일을 평범한 시민이 변화의 물꼬를 틀었다. 그래서 이번 일은 의미가 있고 무섭다. 여승무원에게 폭언과 폭행을 했던 라면 상무는 여론의 뭇매를 맞고 회사에서 쫓겨났다. 대리점주에게 막말 행패로 밀어내기 우유를 팔아 온 모 회사는 경영진까지 나서 대국민 사과를 했지만 그 후폭풍이 아직도 거세다.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잘못된 처신으로 패가망신을 자초한 것이다.

정치권이 먼저 갑을관계를 바로잡겠다고 나섰다. 6월 국회에서 ‘갑을상생’을 도모하는 법안을 우선 처리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정치권에서 나온 말이라 어떤 내용이 남겨져 나올지 예측할 수 없다. 대기업 눈치를 봐야 하고 청와대 지시도 받아야 하고 여야협상까지 해야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집단소송제 도입을 둘러싸고는 이견이 드러나고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 도입에 대해서도 처벌규모를 놓고 답 없는 고민만 거듭하고 있다.

일부 정부 부처에서는 계약서류에 ‘갑을’이라는 용어 자체를 빼겠다고 한다. 굳이 갑과 을이라는 단어를 쓸 필요가 없다면 개선하는 것이 맞다. 그리고 당장 실현 가능한 상징적 조치라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갑과 을이란 단어만 지운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이처럼 너도나도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지만 본질보다는 지나치게 모양새에만 치중하는 모습이다.

갑을관계는 대기업과 하청업체간, 기업과 대리점 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내려 있는 오래된 병폐다. 지방정부 입장에서는 예산을 틀어쥐고 있는 중앙정부가 갑이다. 기업인은 인·허가권을 쥐고 있는 공무원이 갑이다. 공무원도 마냥 갑은 아니다. 언론, 의회와 같이 감시와 견제기능을 갖춘 집단이나 조직에게는 을이다. 월세나 전세로 살면 집주인이 갑이다. 이처럼 다양하고 복잡하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갑이 을이 되고 을이 갑이 된다. 하청업체가 있기 때문에 대기업이 값싸고 손쉽게 완제품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하청업체가 갑이다. 기업인이 있기 때문에 세금이 걷히고 일자리가 생긴다고 생각하면 기업인이 갑이다. 비워 있는 집에 누가 들어와 살아 준다면 세입자가 고마운 사람이고 갑이다. 갑을관계도 생각하기 나름이다.

60갑자를 구성하고 있는 10개의 천간(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은 대자연의 기운 흐름을 순서대로 나타낸 것뿐이다. 애초부터 우열이나 서열의 개념은 없다. 서로 어울려 끝없이 돌아가는 대자연의 흐름에 누가 낫고 못함이 있겠는가. 갑을관계는 생각의 차이에서 시작된다.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하기에 앞서 우리의 생각부터 뒤집어 보자. 그것이 해결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안상근 (객원논설위원, 가야대학교 행정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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