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50)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50)
  • 경남일보
  • 승인 2013.05.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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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허영자 시인과 진주 인연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50)
<11>허영자 시인과 진주 인연 
 
 
허영자 시인의 아버지(허임두)는 진주농고 재학중에 장가들어 진주에서 학생신분으로 살림을 차렸다. 결혼식은 아마도 전통혼례로 함양에서 치루어졌겠는데 어머니(정연엽)는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효리마을 처녀였다. 당시 처녀는 18세였는데 시집살이를 하지 않고 신랑의 학업 도우미로 분가해 산 것이다.

지난 번에 살폈던 것처럼 허시인은 아버지의 첫직장이었던 함양 휴천초등학교의 사택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곧장 일본으로 유학가고 모녀는 함양읍으로 옮겨 살다가 아버지가 유학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로 부산으로 이사해 거기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쳤다. 허시인은 고등학교때부터 서울로 이사가 이후 줄곧 서울 생활을 해왔다.

허시인이 경남여중(2년) 다닐 때 진주 큰집에 다니러 온 일이 있었다. 큰아버지가 솔가하여 부산에서 진주로 이사와 살고 있을 때였다. 큰 아버지는 일본에서 대학을 나오고 광복후 부산에서 떡만드는 기계, 참기름 짜는 기계 등을 일본에서 수입해 도매하는 수입상이었는데 전기 사정으로 국내의 기계들이 제대로 돌아갈 수가 없자 진주로 가게를 이전하였다. 진주역전 마당이 넓은 집이었는데, 가게는 중앙시장 근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큰집에 온 허시인이 중앙시장에 들렀다가 진주교를 건너 큰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진주교 한가운데쯤 건너가는 중인데 건너편 인도를 반대쪽으로 걸어가던 한 중년부인이 갑자기 다리를 가로질러 허영자에게로 와서는 “네 영자 맞제? 부산 경남여중 다니고 있는 허영자 맞제?”하고 반가와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잡비 하라 하면서 약간의 돈을 손에 쥐어 주었다. 허시인은 ‘이분이 도대체 누구일까?’하는 생각이 들어 ‘누구시지요?’ 하고 물어보려 했으나 그 부인은 “영자 너 공부 잘한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공부 열심히 하고 잘 자라거래이” 하고는 길 건너 인도 쪽으로 총총 건너가버려, 어찌할 수가 없었다. 허 시인은 그 뒤 집안 행사나 모임 같은 데 가면 그 부인이 왔는지 늘 살폈으나 그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었다.(누구였을까?)

허시인이 진주를 성인이 되어 찾은 것은 다 시인의 자격으로였다. 확실한 방문으로 필자와 직접 관련이 있었던 것은 첫 번째가 1981년 무렵 천주교 봉곡동 성당의 부활절 신앙강좌였다. 진주지역 천주교회는 1980년에 부활절 신앙강좌를 대대적으로 개최하여 일반 시민들에게 신앙의 의미를 전달해 주고자 했는데 그때의 강사로 김수환 추기경, 전 최신부장관 김기철 회장 등이었다. 김추기경은 옥봉천주교회에서 열린 강좌에서 “지금 실종된 윤상군 때문에 나라가 시끄러운데, 그 범인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범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것처럼 신도 본 사람이 없지만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라는 설득력 있는 낮은 목소리로 진주시민들의 호응을 받았다. 허시인은 그 다음해 홍윤숙 시인과 함께 진주를 찾아 신앙강좌 강사로서 필자가 나가는 봉곡성당에서 시인이 갖는 신앙에 대해 강의했다.

허시인은 연작시 ‘마리아 막달라’를 일부 소개하면서 일관성 있는 신앙심을 강조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만 근의 쇠뭉치 앞에/ 그녀가 섰습니다// 천 근의 돌멩이 앞에/ 그녀가 섰습니다// 이 사무치는 마음과/ 간절한 그리움이면// 갇혀 있는/ 쇠북의 넋을 불러낼 수 있을까요”를 간단히 해설하면서 막달라 마리아의 목숨을 거는 신앙에 대해 부연 설명했다.

두 번째 방문은 경상대학교 교육대학원 여성지도자과정 ‘문학과 삶’을 강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문학은 삶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드러내는 것이 문학이므로 문학을 통해 삶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세 번째 방문은 개천예술제 백일장 심사위원으로서의 행보였다. 그때의 일화는 촉석루와 진주성 일대를 돌아보면서 어린애처럼 좋아했다는 것 말고는 따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촉석루를 지나면서 길거리 솜사탕을 사서 필자에게도 하나 주면서 같이 먹자고 청했다. 여류의 진면목을 보면서 허시인이 필자보다 더 감성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네 번째 방문은 내원사 근처 펜션에서 열린 화요문학회 여름 창작강좌 강사로 초청되어 온 행보다. 김재홍 교수, 김종철 시인 등과 더불어 2박3일간의 워크샵이었다. 밤을 지새며 회원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아마도 이때 필자가 허영자 시인과 가장 많이 흉금을 털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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