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당산나무에는 오래된 이야기가 있다
고향, 당산나무에는 오래된 이야기가 있다
  • 경남일보
  • 승인 2013.05.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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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구 (시인)
폭염이 너무 일찍 찾아 왔다. 오월은 아직 그를 맞을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불청객처럼 와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한다. 기별 없이 폭염이 찾아온 오월 끝 주말 오후 2시 도심의 느티나무 밑에서 더위를 식히는 사이 마음 하나가 오래된 이야기가 일렁이는 고향 마을 당산나무 그늘로 향해 간다.

그곳엔 슬렁슬렁 부채질 하는 마을 노인 서넛이 앉아 있고, 아낙이 삼삼오오 앉아 있고, 동네 꼬꼬마 아이들이 햇볕과 그늘을 한 뼘 거리를 두고 부산스럽게 왔다 갔다 하며 놀고 있다. 노인들은 저마다 뉘 집 자식은 어떻고 저떻고 하면서 지나온 시절의 신세 한탄을 하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아낙들도 시집살이의 고단함을, 자식 키우는 나름의 방식을 서로 토론하며 따글따글한 시간을 어금니로 씹어 먹는 사이, 흙장난을 하는 아이들이 서로 깔깔거리며 웃고 있다. 한 아이가 던진 돌멩이에 맞은 아이가 울고 있다. 햇빛은 여전히 쨍쨍하다. 그리고 저만치 꼴을 한 짐 가득 진 구릿빛 사내가 누렁 소를 앞세우고 당산나무를 지나간다. 당산나무를 지날 때 나뭇가지들이 일제히 제 푸른 손바닥으로 부채질하며 사내의 구슬땀을 식혀준다. 정겨움이 묻어나는 고향의 낮 풍경을 읽고, 또 애절한 사연이 많이 담겨 있는 당산나무의 밤풍경으로 건너간다.

당산나무의 노동시간은 끝도 없고, 일정하지도 않았다. 밤이 와서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가 잠든 시간에도 그는 잠을 청하지 못했다. 마을사람들의 눈을 피해 비손하는 사람들의 사연을 하나하나 들어주며 밤을 꼬박 지새울 때가 많았다. 마을사람들의 온갖 사연을 넓은 가슴으로 품고 있는 여름날의 당산나무는 낮엔 마을사람들의 피로를 풀어주는 선풍기가 되었고, 밤엔 뉘 집 사연을 닦는 손수건이 되어 주었다. 그래서 노동의 시간은 끝이 없었다. 당산나무는 겨울이 와서야 마을사람들의 부적 같은 이야기를 품고 이불도 없이 시린 잠을 청했다. 나무는 뼈가 욱신거리는 잠 속에서도 봄을 고민하고 있었다. 마을사람들이 환한 웃음으로 봄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생각의 나이테를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나무는 훗날 내가 시인이 될 것이란 걸 미리 알고 있었을까? 마을사람 어느 누구도 내가 시인이 될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오로지 마을의 수호신인 이 당산나무만이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나를 이곳까지 인도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 내가 걷는 시인의 길, 제를 지내듯 경건하게 걷고 있다. 또 불안한 마음으로 걷고 있다. 행간에 묻은 웃음과 눈물자국도 불안으로 받쳐 들며 경건의 무늬를 그린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환하게 빛나기를 희망하며 한 발 한 발 무거운 걸음을 옮긴다.

아, 일찍 온 폭염을 식히기 위해 나무그늘에 앉아보니, 고향 당산나무 그늘이 그리워진다. 나이테에 내 이야기의 일부분도 오롯이 새겨져 있을 그 나무가 보고 싶다. 푸른 손바닥으로 바람을 부채질 하는 그 당산나무가 오늘 무척 보고 싶다.

임성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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