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이국땅에서부터 '진주'가 그리웠다
먼 이국땅에서부터 '진주'가 그리웠다
  • 경남일보
  • 승인 2013.05.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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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교포 눈에 비친 진주성과 남명 선생
▲촉석루
 
 
진산 혹은 청산으로도 불리우던 진주는 내가 평생에 무척 가보고 싶던 곳이었다. “아, 아 진주성!!”은 내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써보고 싶던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러니 나의 진주사랑은 조선역사를 배운 17~18세부터이다. 임진왜란 당시 나라의 혼이였던 진주성은 내 가슴 깊이 각인되어 있었고 내 처가 산청 출신의 진주 강씨라 이 또한 나의 진주성에 대한 호기심에 부채질을 하였던 것이다. 이틀에 걸친 진주, 산청 여행은 나의 요청에 의해서 집사람이 서울에 있는 처제내외에게 부탁하여 이루어진 것이다./편집자 주


24일 부산 해운대를 출발하여 통영을 거쳐 진주로 들어와 진주성을 난생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촉석성의 남문문루, 서문, 북문, 동문, 촉석루, 남쪽의 남강, 서쪽의 서장대, 논개의 의암, 가야-마한 등의 유물까지 볼 수 있고 진주의 오랜 전통을 보여주는 박물관, 진주목사 김시민의 동상 등 2~3시간의 아주 짧은 시간에 온 힘을 들여 초점을 잃지 않고 둘러보았다. 또 남강을 향하여 놓여있는 현자총통과 비격진천뢰가 눈에 들어왔다.

당시의 격전 상황이 눈 앞에서 아른거린다. 터지는 대완구소리, 나부끼는 용대기 밑에서 왜군을 향하여 화살, 이장손이 만든 조총, 돌을 날리는 조선군, 이를 돕는 낭자군들의 돌을 깨는 소리, 물을 끓이며 또한 밥을 지어주고 있는 아낙의 모습, 이들을 독려하며 사면팔방으로 뛰는 육상의 이순신, 김시민 장군 등 그 처절하였던 당시를 그려보았다. 나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으며 최대의 경의를 우리혼의 선조분들께 보냈다.

오래전부터 이 진주성이 아주 “험한 성” 이라고 자주 들었다. 나는 이 “험한 성”을 스스로 느끼기 위하여 남강쪽을 제외한 동서북쪽을 열심히 둘러보았다. 성둘레가 2650보, 높이가 25척이라는 이 진주성은 경상, 전라, 충청도를 “보장(保藏)”하였던 성이라고 배웠다. 임진왜란이 400여년 전이라 그때와 지금의 지세가 많이 변하여서 성의 그 험한도를 지금 유추하기는 어려웠다. 모든 것을 감안하여서도 이 진주성이 “험한 성”이라고 보여지지 않았다.

십자군의 마지막 항거지 카락(karak)성은 지금 요르단에 있으며 1000m의 고지에 위치하고 있다. 3면은 깊은 계곡으로 둘러싸여 내가 보기에도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하지만 그 용맹하던 십자군도 겨우 일년을 수성하다가 회교도군의 살라딘(Saladin) 장군에게 항복하였다. 이스라엘의 마사다 성은 그 주위가 100m에서 400m의 깎아지른듯한 절벽의 성으로 이것을 함락시키는 것은 불가능으로 보였다. 하지만 실바(Silva) 장군이 거느리는 수천의 로마군들이 쌓아올린 공격용 램프(Ramp)의 완성과 함께 이 성도 2개월 만에 함락되었다. 이렇게 험한 성들을 직접 관찰한 나로서는 진주성이 험했다는 말에 동의 할 수 없었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 동상.
그렇다면 어떻게 겨우 3700여 조선군이 2만이 넘는 왜군을 상대로 5000여명이나 죽이며 1차전에서 크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 당시에는 이미 한양을 비롯한 조선 전체가 떨어지고 뭉그러진 상태였다. 2차전을 보자. 역시 수천여명의 조선군과 성민(주로 부녀자 노인, 어린아이들) 6만이 왜장 가등청청이 지휘하는 5만이 넘는 왜병들을 상대로 열흘 가까이 버티었다. 당시 왜군은 8도에서 모두 모여들어 소서행정, 가등청정, 조조천융경 등 왜군들의 명장 명장들이 모두 모여 풍신수길의 명령으로 1차전의 패배를 보복하려는 치열한 공방전이었다. 당시 권율장군까지도 왜군의 큰 위세에 눌려 진주성을 돕지 못하고 충청도로 빠져 나가 있는 상태였다.

좌우지간에 이 진주성이 어떻게 왜군을 무찔렀는가를 성을 나오면서 곰곰이 생각하여 보았다. 성의 “험함”이 승리의 제일 큰 원인이 될 수 없었다. 이때 깊이 집히는 것이 있었다. 진주성의 “험함”은 지세를 말하는 것 보다는 바로 사람들의 “험함”을 말한 것이다. 그 정신의 “험함”은 카락성이나 마사다성 보다는 훨씬 더 험한 것이었다. 이 드높고 험하고 용맹한 진주성의 군사, 장수, 성민은 먼저 그 정신(Spirit)에 있어서 왜군을 압도하며 무찔렀던 것이다. 아 바로 그것이구나! 나 나름대로 해답을 얻은 나는 기뻤다. 하지만 또 하나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그 험한 용기와 정신은 어디서 온 것인가? 서울이 두려움에 빠지고 8도가 뭉그러진 당시에 어찌 유독 진주성만 육상에서 그토록 빛을 발할 수 있었던가? 1차전의 김시민 장군, 2차전의 장윤, 황진, 이종인, 의병장 김천일 등등 훌륭한 지휘관들이 싸움을 걸고 독려하였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겨우 수천의 군사와 6만의 성민이 그렇게 피를 흘릴 용기와 결심을 할 수 있었던가? 단결하여 처절히 싸우고 최후까지 운명을 같이 할 수 있었던가? 이 유독한 진주성의 정신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저녁을 먹을때도 잠자리에서까지 묵상하여 보았으나 답을 얻지 못하였다.

다음날 산청으로 향하였다. 남명 조식 선생의 기념관을 들렀다. 친절한 안내원은 여러 문헌을 건네며 설명을 아끼지 않았다. 남명(1501-1572)은 임진왜란 전의 학자로 낙동강 남우측의 일대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곧은 선비로 알려진 남명, 실천과 실행을 중요시 하였던 남명학. 칼을 차는 것을 좋아했던 선비. 그의 칼에 새긴 검명은 경의검. “공경한 자세로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의를 목숨처럼 여긴다”가 그가 추구하였던 철학이였다. 나는 조식선생이 평소에 칼을 차고 다니는것을 좋아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모아졌다. 나는 이씨 조선때에 칼을 차고 다녔다는 선비란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안으로 마음(학문 포함)을 밝히는 것 만으로 그친 조선의 선비들과는 다른 것이 아닌가? 조식선생에 대한 지인들의 해석은 이렇다.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다”, “의를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 “칼 같은 단호함이 그에게 있었다.” 임진왜란시 많은 의병장이 조식선생의 문하에서 나온 것은 물론 우연이 아니다. 나는 이 ‘의’를 실천하는 정신이 진주성으로 은연중 전파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진주성과 산청은 첩첩산으로 막혀있지만 직선거리는 지척이며 물체가 아닌 정신의식이 옮겨가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으리라. 조선팔도가 힘없이 무너질때 피를 흘릴 용기와 결심을 가졌든 진주성은 처절한 특유함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진주성의 처절토록 용맹했던 사람들의 정신을 조식선생의 실천을 강조하고 군사학문연구까지 포함되었었던 경의학에서 찾아보았다. 또한 진주성 인근 대부분의 양반 토호 지배계급은 양민 농민들을 착취하지 않았으며 그들과 서로 좋은 신뢰를 유지하며 살았다고 들었다. 그리하여 이 신뢰가 ‘의’와 합치어서 미증유의 합심과 결심을 이루어 낸 것이 아닌가 유추하여 본다. 답을 찾지 못하여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어지는 듯 하였다.

그리하여 사학자 이병도의 ‘한국사대관’은 2차 진주전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조선혼을 철저히 발휘한 사상의 일대 금자탑. 군·관민이 한 덩어리가 되어 끝까지 사력을 다하여 싸우다가 성의 함락과 운명을 같이 하였다는 것은 실로 조선민족 사상의 광휘라 하겠다.” 오늘의 우리들이 과연 목숨을 걸고 자신을 ‘단도리’ 할 수 있는 칼같이 시퍼런 단호함을 보일 수 있겠는가? 쾌락주의가 극에 달한 오늘의 한국인은 그 귀한 ‘조선혼’을 상기하며 방종한 삶을 반성할 수 있는가?
▲국립진주박물관.
 

그날 저녁 진주성으로 다시 들어오면서 저녁으로 먹을 ‘진주 비빔밥’에 호기심이 모아졌다. 식당 이름은 ‘○○’. 이곳을 소개한 분의 말씀에 의하면 이 식당의 비빔밥은 진주 공방전때 군·관민이 먹었던 전통적인 음식의 향기가 아직 깃들어 있다고 하였다. 과연 어떤 음식을 먹으며 싸웠을까? 그런데 이 식당을 찾지 못하여 한 번화가의 꽃집을 들렸다. ○○식당의 방향을 묻자, 이 친절한 여주인은 가게의 문을 잠그고 우리들의 앞장을 서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 식당앞까지 안내하여 주었다. 이런 친절은 동서고금에 처음 받는 것이었다. 고맙다는 우리들의 인사에 가벼운 미소로 답례하며 돌아서는 이 분을 잊지 못할 것이다.

진주성민들의 외롭고 용맹스러움, 인세의 험함은 역사가 증명하였고 진주시민의 친절함은 한 꽃가게의 여주인이 대표로 보여 주었다. 우리 일행의 진주사랑은 더욱 깊어갔다.

○○식당의 비빔밥은 이채로웠다. 쇠고기 육회가 제일 위에 놓여졌고 같이 나온 국에는 선지가 들어있었다. 육회나 선지는 우리 부부가 먹어본 적이 없어 순간적으로 망설였지만 곧 젓가락과 숟가락을 들고 먹기 시작하였다. 진주전투의 향수가 묻혀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귀한 순간이었다. 육회의 깊은 맛과 양념은 식욕을 돋구고 선지국의 고소함은 일품이여서 또 한 그릇을 더 청하기까지 하였다. 영양가가 높고 아주 균형이 잘 잡힌 음식이었다. 전투에 지친 군 관민들에게 사기를 높여 줄 수 있는 음식이었다. 물론 고금의 차이는 있겠지만.

식사를 마치고 사천 비행장으로 향하는 나는 몹시 즐거웠다. 숙원이었던 진주성 답사에 처가의 본적지를 가보고 친절하였던 한 진주시민은 우리들을 더욱 즐겁게하고, 맛있는 음식에 배도 부르고, 이런 종합적은 만족은 자주 오지 않는다. 아, 진주성이여 나의 감사한 마음을 받아 주시오.

/이영무 재미교포
사진=오태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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