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심과 자만, 산행에서 깨우친다
방심과 자만, 산행에서 깨우친다
  • 최창민
  • 승인 2013.05.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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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민 경제문화체육부장
십수년 전 여름, 일행 2명은 산상화원으로 불리는 백두대간 점봉산과 마딱뜨렸다. 이 산을 넘어 한계령과 설악산 대청봉까지 갈 요량이었다. 유명가수가 부른 ‘한계령’ 가삿말에 로망이 있었을 뿐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질 설악산에 대한 기대에 가슴이 설레었다.

한치 앞이 안보일 정도로 짙은 안개가 끼었고 비까지 쏟아졌다. 장시간 산행에 방수 자켓은 무용지물이 돼 속옷까지 젖어버렸고 심신이 지쳐갈 무렵 점봉산에 닿았다. 아무말 없이 오이를 삼키듯 꾸역꾸역 먹어치웠고 주변을 한번 휘둘러보는 것으로 휴식을 끝냈다.

조망이래야 안개가 지천이니 볼 것이 별로 없었는데 나뭇가지에 걸린 하얀 손수건이 눈에 들어왔다. 도망치듯 한계령으로 발걸음을 재촉, 한참동안 내려선 뒤 갈림길을 만났다. 두개의 길, 별 생각 없이 본능적으로 왼쪽 길을 택해 한계령의 달콤한 휴식만을 그렸다.

1시간을 더 걸어 망대암산으로 여겨지는 정상에 닿았다. 이게 웬일인가. 1시간 전에 봤던 하얀 손수건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게 아닌가. 귀신에 홀렸나. 소름이 돋았고 섬뜩하기까지 했다. 요샛말로 멘붕. 도대체 그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정신을 차리고 기억을 더듬으니 조금 전에 있었던 갈림길이 문제였다. 그곳에서 길을 잘못들어 왼쪽으로 산허리를 빙빙 돌아 1시간을 헤맨 끝에 다시 점봉산 제자리에 돌아온 것이었다.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계속해서 제자리에 돌아오는 현상을 독일말로 ‘링덴바롱’이라고 한다. 이런 현상에 빠지게 되면 낭패정도가 아니다. 가령 홀로 등산객이 궂은 날씨에 옷이 젖고, 장시간 산행에 지친 상태에서 이런 늪에 빠지게 된다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결국 탈진과 저 체온증으로 이어져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비슷한 예로 ‘알바’라는 말도 있다. 등산객들 사이에 은어처럼 통용되는 말이다. 예정된 등산로를 산행하는 것을 주업개념으로 보고,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들어 예정에 없던 코스로 헤매 다니는 것, 즉 부업개념의 아르바이트라는 얘기다.

오래된 기억, 그때를 생각하면 섬뜩하고 또 새롭다. 만약 당시에 정상에서 허투루 지나 하얀 손수건을 본적도 없고, 봤다고 하더라도 기억해내지 못했더라면, 또 정신을 차리지 못했더라면 어찌됐을까. 아마도 이 산을 빙빙 돌아야 했을 것이다.

‘방심과 자만’이 부른 결과다. 지금도 그 기억은 산행할 때 흐트러진 마음을 추스르는 반면교사가 된다. ’방심과 자만’, 대개 최고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할 때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다.

최근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한국 산악인 2명이 사고를 당했다. 하산할 때 일어난 사건이다. 정상에서의 환희와 희열, 감격보다 내려갈 때 위험이 더 많이 도사리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산행의 환경이 어땠는지 잘 모르지만 조금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얼마 전 만난 허영만 화백의 말은 의미 있게 들린다.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에베레스트, 킬리만자로, 칼스텐츠를 오른 적이 있는 그는 “저는 항상 2등이었습니다. 대학도 못 갔고 만화가직업에서도 2등이었습니다. 하지만 1등은 내려갈 날만 남았고 2등은 위로 올라갈 가능성이 항상 있었죠” 1등의 자만, 1등의 방심을 항상 경계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산에서만 이런 교훈이 있는 것만은 아니다. 평상 시 우리가 길을 걸어갈 때도 차를 운전할 때도 방심하지 말것과 자만하지 말것을 충분히 경험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를테면 산에서는 조금 더 위험한 상황에 노출됨으로서 더 실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흔히 삶이 산에 오르는 것과 닮았다고 말한다. 오름길 내림길 갈림길 험한길 편한길의 연속이 지난한 삶과 닮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고 산이라는 존재가 사람들에게 ‘옛다 이게 삶이다’라고 일러 주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느끼고 깨우칠 뿐이다. 해결책은 내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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