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한담 (山中閑談)
산중한담 (山中閑談)
  • 경남일보
  • 승인 2013.06.07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병철 (관봉초등학교 교장)
치자꽃, 접시꽃이 아름답게 피는 유월이다. 어깨에 걸친 가벼운 옷자락도 문득 무겁게 느껴지기도 한다면 고요한 산속의 작은 절집이 생각난다. 한때 산청의 오지이기도 한 오부면 가마솥 골 한적한 산골학교의 교감으로 잠시 근무한 적이 있었다. 고만고만한 초등학생이 열일곱에 유치원 아이 일곱이 있어 다행히 스물을 겨우 넘긴 아주 조그만 시골학교였다.

학교를 벗어나 잠시 걷고 나면 왕촌리라는 동네가 나타나고 동네 뒤편에 제법 산세가 수려한 바랑산이라는 산이 있다. 마을 뒷길을 지나 저수지를 낀 산길로 한참을 오르면 길이 끝날 무렵 속세를 벗어난 듯 구름 속에 든 조그만 절집 하나를 만난다. 말이 절이지 웬만한 절의 암자만 못한 아주 허름하고 지붕이 없는 노천의 법당과 사람이 기거하는 움막 같은 집이 하나 있을 뿐이다. 가난한 절집의 부처님은 지붕이 없는 노천 법당에서 바람 부는 날이면 거센 바람을 맨몸으로 견디고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어깨에 눈을 쌓는다. 그러니 이 절에 따로 스님이 있을 리도 없고 찾는 손님도 적적하다. 오래전 이 절을 세운 노스님이 계시긴 했으나 나이가 들어 타계하시자 이 가난한 절을 맡아 지켜 줄 스님이 없게 된 까닭이다. 다만 검게 그을리고 깊은 주름을 얼굴에 건 노 보살 한 분이 있다. 한때 가톨릭이기도 했던 내가 지금도 잊을 만하면 다시 이 절을 찾는 건 순전히 노 보살 때문이다.

이런저런 세상일은 늘 순탄하지는 않은 법. 그런 날 산모퉁이를 걸어 한참을 올라가다 보면 노 보살은 지붕 없는 법당에서 홀로 먼지를 쓸고 있기도 하고 때로는 손바닥만한 산비탈 밭이랑의 잡초를 뽑고 있다. 때로는 이즈음이면 적적한 절집 앞마당에 접시꽃 몇 그루가 환하게 웃고 있어 노 보살 대신 손님을 맞기도 한다. 홀로 지내는 깊은 산속 살림이라 무섭기도, 적적하기도 할 법한데 전혀 내색은 없다. 빈방에서 하룻밤을 청해 밤이라도 새우면 맑은 하늘의 별을 다 헤아릴 칠흑 같은 맑은 어둠이 온 산에 가득하다. 고요한 방에 홀로 앉아 차 한 잔 곁에 두고 방문을 열어 바람에 비켜 앉은 달그림자를 보노라면 한낮 노루목처럼 긴 햇살에 속살을 내놓고 몸을 말리던 산기슭도 밤이 되자 속절없이 적막해진다.

그래도 마음이 헛헛하여 눈앞이 흐려진다면 그을린 세월만큼이나 묵선(墨線) 깊게 팬 주름을 얼굴에 걸고 살아온 노 보살을 청해 말없이 따라주는 차 한 잔을 마셔 볼 일이다. 차의 첫 향기가 온 가슴에 스며들 때 쯤 눈을 들어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風磬)에서 달려 나오는 맑은 소리를 쳐다보면 세속에 찌든 때가 씻겨가고 티끌 묻은 눈이 저절로 맑아진다. 어느새 산의 바위를 닮고 사는 노 보살의 뒷모습에서 달그림자에 접힌 바랑산의 그늘처럼 무거운 삶의 깊이를 잰다.

세상일이 번거롭고 잠시의 여유가 그리울 때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찾아들 수 있는 절집 하나 있어 얼마나 큰 다행인지 모르겠다.

/관봉초등학교 교장

경일춘추=김병철
김병철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