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꽃자리
나의 꽃자리
  • 경남일보
  • 승인 2013.06.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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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준 (지리산고등학교 교사)
교사로 살다보면 학생과 부대끼며 하루하루의 일상은 지극히 평범하게 흘러가지만, 가끔 그 일상 중에서 가장 기쁜 순간, 가장 힘든 순간들이 있다. 가장 기쁜 순간은 가장 힘든 순간을 치유하고, 가장 힘든 순간은 가장 기쁜 순간을 기다리게 하며 살아갈 매순간의 힘을 북돋워 준다.

교사로 살면서 가장 기쁜 순간은 아마 “선생님 생각나서 문자했어요”라는 연락을 받을 때인 것 같다.전혀 생각하지 않고 지내다가 가끔씩 예전의 제자에게 연락을 받을 때면 여간 기쁘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잊지 않아 줬다는 것이 고맙기도 하고, 또 자신의 삶에 고민이 있어서 오랜만에 연락해온 경우는 더욱 고맙다. 어쩌면 교사라는 직업은 매일 새로운 학생들을 먼저 사랑하고 떠나보내며 나를 잊지 말아줬으면 하는 바람을 끝까지 지니고 사는 직업일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에 첫 교직생활을 시작한 학교에서 함께했던 제자에게 연락이 왔다. 이 학생은 그때에도 나를 참 잘 따라 주었는데, 최근에 너무 힘든 일을 겪어서 내가 참 보고 싶었다고 한다. 당시 이 학생은 다른 반 여학생과 교제를 시작했고, 최근까지 이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 학생은 대학입시에 실패했고, 그 여학생은 명문대 간호학과에 합격하게 된 것이다. 결국 그 여학생은 다른 대학교 선배가 좋아졌다고 하며 떠났다고 한다.

죽을 만큼 힘든데, 내 생각이 나서 연락을 했다고 하는 이 학생을 위해 나는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과 그가 겪을 엄청난 고통에 비해 너무도 초라한 위로를 해주는 것 외에 달리 해줄 것은 없었지만 힘들 때 나를 생각해주고 찾아준 것이 참으로 고맙고 기뻤다. 그리고 그 학생이 연락을 마무리하면서 남긴 말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고등학교 때 입시 때문에 제일 힘들었지만, 그래도 친구들과 재밌는 추억이 가장 많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때 선생님이 함께 계셔서 참 좋았어요.” 아직도 나는 이 학생의 가장 행복했던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 속에 살아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에게 가장 힘들지만 행복하고 특별한 일생의 단 한번의 시간 속에 계속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까. 가끔씩 떠난 제자들에게서 ‘그때가 그리워요, 보고 싶어요 선생님.’ 이런 연락을 받을 때면 잔잔한 행복감에 사로잡히고, 그들의 기억속에 자리 잡은 내 자리가 바로 나의 ‘꽃자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의 그리움은 내가 그때 후회없이 이 학생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반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떠올리는 그 그리움의 자리가 내게 가장 큰 기쁨인 나의 ‘꽃자리’인 것 같다.

매일 입시문제로 진로문제로 아파하며 흔들리는 청춘들과 함께하며 후일에 그리워하게 될 우리의 꽃자리를 찾기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시방 네가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라는 구상 시인의 시를 떠올리며 또 다른 제자들의 기억속에 살아갈 나의 꽃자리를 기대해 본다.

이예준 (지리산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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