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 달 특별기획]정전 60주년, DMZ를 가다 <중>
[호국보훈의 달 특별기획]정전 60주년, DMZ를 가다 <중>
  • 이은수
  • 승인 2013.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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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구름 넘나드는…갈 수 없는 곳의 경계
 
철원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북녘땅2
철원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북녘땅.

DMZ는 동서 두 진영 20여 개국이 치열하게 전쟁을 치렀던 곳이다. 이토록 다양한 민족, 국가가 한 자리에서 전쟁을 한 경우는 인류역사상 유래가 없다. 철의 삼각 냉전 유적지·한탄강 승일교·꺼먹다리·파로호·단장의 능선 등을 살펴봤다. 각종 무기와 군사체계, 전투역량 그리고 국민성, 민족성이 반영됐던 모든 고지, 벌판, 강 등의 전적지는 그 자체가 군사박물관이다. 이는 DMZ투어가 결코 가벼울 수 없는 이유기도 하다. 그 속에는 분단으로 인해 지금껏 흐르지 않는 강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20세기가 남기고간 냉전유적은 DMZ문화를 꽃피우는 토대가 됐다.

제2땅굴 기념관
제2땅굴 기념관


◇철의 삼각 냉전 유적지

철원 땅에 들어서자마자 포탄자국과 총알구멍이 잔혹하게 나 있는 콘크리트 건물이 흉물스럽게 서 있다. 북한 노동당 당사의 잔해다. 1951년 6월 29일을 전후해 철원 일대는 연합군의 총 공습을 받았다. 이로인해 당시 3만여 인구가 살았던 철원읍은 폐허가 됐다. 노동당사 역시 B29의 무차별 폭격을 받았지만 유일하게 남아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당사 계단에는 북진하던 미군의 탱크가 짓밟고 올라간 캐터필러 자국이 아직도 선명하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지역은 개간 등으로 산림이 많이 훼손됐다. 잇따금씩 노루와 멧돼지떼가 들판을 지나치기도 한다.

특히 제2땅굴(철원)·4땅굴(양구)을 한동안 걸으며, 20여년전 신병 때 가 본 제3땅굴(파주)이 떠올랐다.

후한(後漢) 말 요동의 실력자 공손찬(公孫瓚)은 원소(袁紹)가 성 밑으로 파고 들어온 땅굴을 막지 못해 패망했다. 철원 땅굴은 평화 분위기가 무르익던 7·4 남북 공동성명이 발표된 1972년 파기 시작했다. 땅굴은 그렇게 모순된 환경에 사는 우리의 현실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철원평화전망대 앞 탱크.
철원평화전망대 앞 탱크.

 
◇김일성은 왜 철원에 집착했을까

철원은 태봉국을 세운 궁예가 유토피아를 꿈꿨던 곳이다. 드넓은 평야가 있어 농사가 잘 됐을 뿐 아니라 사통팔달 교통이 발달했다. 경성―원산간 철도 및 금강산전기철도가 모두 철원을 지나갔다. 북한군이 6·25직전 화포와 탱크를 전기철도로 실어 날랐다는 증언도 나왔다. 척박한 북한의 지형을 볼 때 철원은 그야말로 곡창지대며 군사적 요충지였을 것이다. 함광복 DMZ소장은 “철원의 노른자위에 노동당사를 짓고 대남첩보공작과 전쟁준비를 하기에 최적의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김일성의 철원에 대한 애착은 철의 삼각지대 전투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철원일대를 차지하기 위해 총력을 투입했고 직접 전투지휘를 하기에 이른다. 백마고지, 김일성고지, 오성산, 아이스크림고지 등에서 치열하고도 처절한 전투가 전개됐다. 그 중 가장 그가 집착했던 백마고지를 빼앗기자 김일성고지에서 사흘을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군인의 거리, 사방거리

강원도 화천군 마현리 사방거리. 삭막한 최전방지역 한가운데에 있는 이 작은 군사도시는 군인들 사이에 꽤나 유명한 거리다. 특히 15(승리), 7(칠성), 27(이기자)사단 예하부대 장병들에게는 추억이 깃든 곳이다. 고향갈 생각에 들뜬 군인들은 가게에서 차표를 끊고 오매불망 버스가 오길 기다렸다. 군인마트, 통닭집, 우체국도 변함없다. 모처럼 외박나와 삼결살에 반주한잔을 곁들였던,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반갑기만 곳이 아닐 수 없다. 사방거리 하면 코끝이 찡해지는 대한민국 남자들이 있을 것이다. 제대하면 그쪽을 향해 오줌도 누지 않겠다는 맹세는 시간이 흘러 괜한 그리움을 남긴다. 힘겨웠던 군시절도 젊은 날을 상징하는 또 다른 표시이기 때문이다. 그 옛날 서울다방, 꽃다방 미쓰김은 안 보여도 거리의 주인공인 신세대 장병의 절도있는 모습은 패기가 넘친다.

노동당 철원당사.
노동당 철원당사 전경.
 

◇‘고지전’의 가슴아픈 현장

양구는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격전지였다. 그래서 이곳의 산들은 무명봉이었지만, 하루에도 몇 차례씩 주인이 바뀌는 처절한 싸움 뒤에 이름이 붙었다. 단장의 능선, 피의 능선, 펀치볼 분지, 크리스마스 고지, 유엔 고지 같은 이름들이 지어 진 것. 1951년 8월 17일부터 9월 5일까지 피의 능선에서는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 벌어졌는데, 그때의 상황을 미국의 역사학자 페렌바흐는 ‘이런 전쟁(This Kind Of War)’에서 “보잘것없는 이 둥근 언덕 세 개를 차지하기 위해 4000명도 더 되는 아군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탄식했다.

미군이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를 치른 것으로 꼽는 단장의 능선에서는 1951년 9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4만 명의 군인들이 사상했으며, 이때 미군이 쏘았던 포탄이 20만 발도 넘었다고 한다.

전방으로 갈수록 완전무장한 군인들, 줄지어 달리는 탱크와 군용트럭, 저공비행하는 헬기들을 만난다. 유월의 푸른 하늘을 진동시키는 총성과 포성은 분단 현장을 살아가는 한반도의 오늘의 모습이다.


◇6·25의 상흔 간직한 파로호

한탄강 승일교, 승리전망대, 꺼먹다리, 화천댐을 잇따라 둘러보면서 ‘끝나지 않은 전쟁’에 심경이 복잡해졌다. 머리도 식힐겸 파로호 선착장에서 페리물빛누리호를 타고 비수구미에 있는 ‘평화의 댐’으로 향했다. 푸른 하늘을 품고 있는 초하의 파로호는 잔잔한 물결속에 더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하지만 뱃길 24km 절경속엔 6·25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용백 선장은 수려한 경치의 이면에 얽힌 얘기를 들려줬다. 이 선장은 “6·25전쟁의 화천전투 때 북한군과 중공군 수만 명을 수장한 곳이라 하여 초대 대통령이 파로호라고 명명했다. 8·15광복 직후에는 38선으로 막혀 있었으나 6·25전쟁 때 수복한 지역으로 전후 5년간 물을 먹지 못하게 할 정도로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전개됐다”고 전했다. 아울러 “지금 배가 지나가는 곳의 깊이는 50m가 좀 넘는다. 1944년 일본에 의해 이 댐이 만들어지기전 이 호수의 바닥에는 면사무소가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DMZ 펀치볼 전투
양구전쟁기념관.


◇평화의 종 타종

너른 호수를 40여분간 달려 드디어 ‘평화의 댐’에 도착했다.

북한강의 줄기를 따라 더 이상 갈 수 없는 최북단에 2005년 2단계 증축공사를 마친 평화의 댐이 버티고 섰다. 총길이 601m, 높이 125m, 저수용량 26억 3000만톤, 저폭이 260m인 대규모 댐은 군사분계선 남쪽 9㎞ 지점에 건설됐다. 이로 인해 한강은 전체수량의 12%를 잃었으며 금강산댐에서 DMZ를 거쳐 평화의 댐에 이르는 북한강 19㎞의 수역은 물길이 가로막힌 흐르지 않는 강이 되었다. 모든 강은 흐른다는 말이 DMZ에는 맞지 않는 것. 평화의 댐을 벗하며 부근에 ‘비목공원’이 있다.

무명용사의 젊은 영혼이 깃든 거친 돌무덤에는 이름 모를 들꽃이 피어있고, 뭉게구름은 무시로 휴전선을 넘나든다. 평화의 댐에는 ‘세계평화의 종’으로 명명된 거대한 종이 있다. 윗머리에 조각된 네 마리의 비둘기 중 북쪽을 향한 비둘기는 통일의 그날을 기다리며 한 쪽 날개의 절반만 남아있다. 세계평화의 종’은 맥놀이가 2분50초∼5분 정도 계속된다. 한밤에 타종하면 청아한 종소리가 50㎞ 이상 울려 북한에서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평화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나니, 평화로운 마음을 가꿔보세요!’라고 말한 수치 여사의 메시지가 눈길을 끈다. 평화의 종을 타종하면서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글·사진=이은수기자 eunsu@gnnews.co.kr
※이 기사는 한국언론재단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제4땅굴 전경.
제4땅굴 전경.
 
양구 전쟁기념관
양구전쟁기념관에 펀치볼전투 등 전사자의 명단이 빼곡히 적혀있다. 천장에는 조국을 위한 산화한 호국영령들을 기리며 헬멧이 매달려 있다.


제4땅굴- 남침분쇄 탑
제4땅굴 입구에 세워진 남침분쇄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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