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온기
존재의 온기
  • 경남일보
  • 승인 2013.06.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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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준 (지리산 고등학교 교사)
교사로 살면서 가장 힘든 순간은 학생들의 고민에 대한 나의 위로가 그들의 마음속 깊이 미치지 못한다고 느껴질 때인 것 같다. 상담할 때 털어놓는 고민의 무게가 나의 가슴마저 옥죄어 올 정도로 무거운 반면, 그들을 위해 내가 늘어놓는 위로들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지난달에는 우리 반 여학생들이 찾아와 상담을 했다. 원래 가정이 힘든 상황이었지만 수험생이라는 상황이 고민의 무게를 가중시킨 것이다. 그 여학생은 어머니와 언니가 장애인인데다 경제상황이 더 어려워져 도저히 수험생활에 집중하기 어렵다고 눈시울을 적셨다. 또 할머니는 심장병으로 쓰러지고 아버지마저 일하다 다리를 다쳐서 그나마 적었던 수입마저 끊기게 됐다며 울먹였다.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 나이의 학생들이 감당하기엔 이들을 내리누르는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학생들과 상담을 하며 이제까지 알고 있던 모든 지식, 모든 경험들로 이들을 위로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들의 슬픔의 물꼬를 위로로 막아주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날 이후로 위로란 것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게 됐다. 무거운 사연의 무게보다 더 무거운 위로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나의 고민은 법정 스님에 관한 일화를 읽고 이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얻게 됐다.

한 여인이 스님을 찾아왔다고 한다. 여인은 유학을 마치고 입대를 준비하던 아들이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극도의 슬픔으로 몸서리치며 스님을 찾아와 식사를 하는데, 함께했던 류시화 시인은 법정 스님이 식사를 마칠 무렵 그녀의 슬픔을 어루만져줄 말을 해줄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아들은 그 인연만으로 그녀에게 왔다간 것이다, 우주가 잠시 그녀에게 아들을 맡겼다가 데리고 간 것 뿐이다’ 등의 말을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법정 스님은 끝내 아무 말을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모든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반찬을 좀 더 가까이 놓아 주셨다.

놀랍게도 식사를 하는 동안 이들 사이엔 어떠한 화학작용이 일어났는지 여인은 아주 가느다란 평화의 빛을 회복하는 것이 보였다고 한다. 류시화 시인은 식사하는 내내 여인에게서 한순간도 눈과 귀를 떼지 않은, 그녀의 존재에 대한 스님의 강렬한 집중이 그녀의 슬픔을 위로한 것 같다고 했다.

이 여인의 슬픔을 위로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시인의 말처럼 그녀의 존재와 슬픔에 대한 스님의 강렬한 집중이었을까. 아니면 그녀의 이야기를 정성스레 들어줌이었을까. 한참을 고민하고 나서야 그녀의 슬픔을 진정 위로했던 것은 법정 스님이 지닌 ‘존재의 온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치열한 고뇌와 성찰 속에서 닦여져 우러나오는 ‘존재의 온기’가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혹한과 같은 존재의 슬픔을 녹여낸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지닌 존재의 온기는 얼마쯤일까. 아직은 아스라이 멀지만 가슴이 먹먹해지는 무거운 사연 앞에 초라했던 위로에 대한 자책과 반성이 쌓여 나의 ‘존재의 온기’를 조금씩 덥혀갈거라 믿는다.
이예준 (지리산 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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