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속의 ‘진주 포로마을 晉州島’
일본속의 ‘진주 포로마을 晉州島’
  • 경남일보
  • 승인 2013.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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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기 (논설고문)
전쟁 포로하면 6·25를 말하지만 5000년 역사에서 대륙과 해양으로부터 931회의 침략을 받다보니 수없이 많은 선조들이 납치되어 대륙과 해양 쪽으로 포로로 끌려가 조국으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이국땅에서 한을 품고 생을 마감했다. 백제는 서기 660년에 사비성이 함락, 개국 678년 만에 멸망했다. 당나라 소정방은 의자왕·태자·왕족 등 93명과 백성 1만2870명을 포로로 잡아 갔다. 고려 때에는 몽고군이 침략, 무차별로 학살을 당한 숫자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지만 30여년에 걸친 전란으로 민족의 멸종을 우려, 항복했을 정도라 한다. 그 때 포로로 끌려간 숫자가 20만 명이나 된다.

교토 지날 때 申維翰의 海遊錄기록

1592년부터 7년간의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왜군에 포로(피로인:被擄人)로 납치된 숫자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연구가에 따라 2만~3만 명, 5만 명, 10만 명, 심지어는 40만 명이라고 추산 한다. 왕조실록에 쇄환자(刷還者:송환자)는 3회에 7500명 여명을 비롯, 전체적으로 1만 여명도 안된다. 포로를 10만 명을 추산해도 10분의 1 정도에 그쳤다. 1607년 당시 첫 쇄환단의 부사였던 경섬(慶暹)이 쇄환자 수를 두고 말하기를 오직했으면 “‘구우일모(九牛一毛)’, 즉 말하자면 아홉 마리의 소 가운데 털 한 개를 뽑은 정도”라는 말을 감안 할 때 실제 쇄환자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간 포로만 최소 5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정약용은 ‘비어고’에서 심양으로 간 포로가 50만~60만 명인데 몽고군에게 붙잡힌 자는 셈하지 않아 얼마만큼 잡혀가 노예가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도 없다고 했다. 현대에는 1950년 6월 25일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북한의 전면 불법남침 때 동족상잔의 참혹한 3년 전쟁으로 국토전역이 폐허로 변했고, 인명 피해가 300만 명이 넘는 미증유의 참극을 겪었다. 납북자만도 9만 여명으로 현재 북한에 생존해 있는 국군 포로도 500여명으로 국방부는 추산한다.

임란의 진주성 제2차 전투 후 126년이 지난 1719년 제9차 통신사 사절단의 제술관(製述官:기록관)으로 일본에 갔던 신유한(申維翰)이 교토(경도:京都)지역을 지날 때의 해유록(海遊錄)에서 10여리쯤 더 가서 성을 바라보니 하얗게 분칠한 담이 어른어른 보이는 곳은 후시미성(복견성:伏見城)이다. “그 당시 어떤 일본인이 요도강(요도가와:정강:淀江) 기슭에 ‘진주도(晉州島)’라는 마을이 있는데, 임란 때 포로로 잡혀온 조선의 경상도 ‘진주(晉州)’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지금도 그 마을에는 다른 지역 출신들이 한명도 없습니다”. “그 때의 일을 상상해 보니 모골이 송연해졌다”고 했다. 임란 때 왜군과 전국 큰 전투 42회 중 진주성은 2번이나 치룬 곳이다. 1593년 7월 30일(음력 6월 29일)까지 9일간의 진주성 제2차 전투는 8여개월 전 제1차 전투(1592년 11월 13일)인 진주대첩에서 패한 설욕을 위해 동원된 9만3000여명의 대규모 왜적과 싸우던 조선의 관군 4500여명 등 7만 민·관·군은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목숨을 초개 같이 버렸거나 왜군에게 도공, 유학자, 어린이, 여자 등 ‘몇 만 명’이 포로로 끌려 간 날이다. 왜군은 복물(卜物)을 30척의 배에 싣고 남강에서 김해로 갔고, 하도 납치자가 많아 일본 속에서 ‘진주도’라는 한 고을에 ‘진주’포로 대부분이 교토(경도:京都)지역에 살고 있었다는 ‘신유한 통신사의 기록은 놀라운 일이다. 촉석루 남쪽 기둥에 신유한의 주련 8개가 현재 걸려 있다.

晉州島 찾아내는 일 진주가 마땅히 해야

안타깝게도 교토지역은 현재 신유한이 기록해 놓은 ‘진주도’는 개발로 인해 지형이 크게 변해 알 수 없으나 진주 사람들은 일본의 고문서 등을 통해 ‘일본속의 포로마을 진주도’를 찾아내는 일은 마땅히 현재 ‘진주인’들이 해야 할 일이다. 이스라엘 장교들은 임관식 때면 2000년 전 로마군에 끝까지 항전하다 자결로 민족혼을 지킨 ‘마사다 요새의 비극’ 960명의 옛 용사들을 참배한다. 7만 민·관·군이 장열이 순국한 날로부터 오는 30일이면 420년의 세월이 흘렸지만 부끄럽게도 별다른 행사도, ‘7만의총’을 비롯, 조형물도 없다. 그렇지만 거룩한 순국의 얼은 아직도 진주성 곳곳에 배어있다.
이수기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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