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기 논개를 따라…자연의 맛을 따라
의기 논개를 따라…자연의 맛을 따라
  • 경남일보
  • 승인 2013.07.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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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운의 맛이 있는 여행 <21>논개 이야기
송어회 상차림
송어회 상차림
 
 
우리 역사상 980여회의 외침 중 가장 처참했다는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421주년이다. 왜란 때 진주에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두 차례의 진주싸움 중 제1차의 진주싸움은 1592년(선조 25년) 10월 5일 진주에 이른 나가오카 다다오키 휘하의 왜군 약 2만 명이 수천 개의 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진주성을 공격하였지만, 진주목사 김시민이 지휘하는 3800명의 군사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 화약을 장치한 대기전을 쏘며 대나무 사다리를 파괴하고, 마른 갈대에 화약을 싸서 던지거나 끓는 물과 큰 돌을 던지는 등 필사적으로 싸웠으며, 성 외곽에서 최경회가 이끄는 의병들의 맹활약으로 우리 군사의 10배에 이르는 왜군의 공세를 분쇄하여 대승을 거두었으니 이를 진주대첩이라 하고, 진주대첩은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린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의기 논개의 순국으로 알려진 제2차의 진주싸움은 제1차 싸움에서 참패로 위신이 손상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3년 복수전을 하도록 명령을 내려, 6월 19일 10만여 대군을 사방으로 나누어 진주성을 공격했다. 당시 진주성에는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등이 이끄는 3400명의 병력과 6∼7만 명의 민이 있었다. 전투력은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11일간의 피비린내 나는 혈투 끝에 29일 진주성이 함락되는 수모를 겪었다.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 최경회 등은 왕이 계신 북쪽을 향하여 하직 인사를 올린 후 도도히 흐르는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하였고, 왜군은 남은 군·관·민 6만 명을 사창에 넣어 모두 불태워 학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축도 모두 도살하였다니 그들의 만행에 치가 떨린다.

전투가 한창일 때 논개는 성안에서 열심히 수발을 들었지만 후일을 도모하라는 최 병사의 엄명에 성을 빠져나와 외진 곳에 은신하다가 최 병사의 순국 소식을 접하고 비장한 결심을 했다. 마침 칠월 칠석에 왜군이 촉석루에서 관기들을 불러놓고 전승축하연을 갖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때를 놓칠세라 연회장에 숨어들어 요염한 자태로 게야무랴 로쿠스케를 유인하여 손에 가락지를 낀 손으로 왜장을 껴안고 의암에서 도도히 흐르는 남강으로 투신 순절하였다. 올해 순국 420주년 의미를 담아 ‘교방예술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지난 5월 개최된 제12회 논개제를 상기하면서 이번 맛이 있는 여행은 논개의 흔적과 혼을 찾아 길을 나서 먼저 진주성에 올라 의기사와 의암을 둘러본다.

의기사는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의기 논개를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으로 1629년인 인조 7년에 진주의 선비들은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전각하였고, 경종 2년에는 그 위쪽에 ‘의암사적비’를 세웠으며, 영조 16년에 병사 남덕하는 의기정포를 계청하여 왕의 윤허를 받아 의기사를 창건하여 이후 세 차례의 중수와 중건을 거쳤고, 지금의 건물은 1956년 의기창렬회에서 시민의 성금으로 재건하였다. 1868년 진주목사 정현석의 노력으로 매년 6월 논개를 기리는 의암별제가 마련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중단되었다. 의기사를 참배하고 의암을 둘러보며 유유히 흐르는 남강을 내려다보며 잠시 님의 애국충정에 숙연해져 옷깃을 여미며 진주성을 내려선다.

다음으로 갈 곳은 님의 묘지인데, 서상으로 가는 길이 좀 멀어서 점심부터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편안한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집이 있을까 생각하니 산청한우생고기집이 떠올랐다. 이런 날 생고기집이냐고 의아하게 생각하겠지만 그냥 음식 맛이 좋아 자주 찾는 집인데 오늘은 한우고기가 아닌 선짓국이다. 안주인의 음식 인심이 얼마나 좋은지 선짓국을 시켜도 다양한 찬이 한정식처럼 나온다. 시골의 어른들이 손수 농사지으신 야채로 만든 나물이며 김치에 전까지 나와 깊은 맛을 내는 선짓국으로 속을 단단히 보양한다. 선지에는 피를 만드는 단백질과 비타민, 철분 등 여러 가지 영양소가 있으니 우거지와 무 콩나물과 같은 비타민과 무기질 펙틴 섬유소가 풍부한 식이성 섬유를 넣어 끓인 선짓국은 보양식으로 손색이 없다. 이제 녹색의 물결로 손짓하는 산야를 헤치며 서상으로 달린다.
논개시비
논개시비
논개묘
논개묘

최근에 논개의 묘지가 발견되었다 하여 논란이 많았는데, 그 곳은 함양군 서상면 방지리이다. 함양 지역에는 조선 후기 이후 신안 주씨들이 유력 양반 사족으로서 상당한 지역적 기반을 가진 문중이었다. 그리고 서상면 방지리는 논개의 부모가 일시 웅거했다고 전해지는 지역이라 논개의 출생지인 주촌마을과 고개를 넘어 왕래할 수 있는 지역이어서 그 타당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육십령을 향하여 차를 달리다가 서상면 소재지에서 좌회전하여, 시골길이라 조심스럽게 다리를 건너 표지판을 따라 묘지를 찾아갈 수 있다. 함양군은 논개의 넋을 추모하고 충절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난 1989년 봉분정비와 사당을 건립하는 등 성역화 사업을 완료하고 매년 음력 7월7일에 추모제향을 올린다.

다시 서상으로 나와 육십령으로 향한다. 서상에서 서북쪽으로 26번 국도를 따라 60여 구비를 돌아 올라가면 소백산맥의 준령 700여m 고지에 영남과 호남을 가르는 도계 표식이 서 있는 육십령에 이르는데 여기가 구름도 쉬어 넘는다는 육십령이다. 옛날에는 재가 너무도 험준하고 화적떼들이 들끓어서 재를 넘는 이는 재물을 빼앗기거나 목숨을 잃기가 일쑤였다고 하는데, 육십령이란 이름은 60명 이상의 장정이 모여야 안전하게 재를 넘을 수 있다고 해서 혹은 재를 넘는데 60여 굽이가 있다하여 붙여졌다 한다. 삼국시대에는 나제국경의 요새지로서 성터와 봉화대 자리가 지금도 남아 있다.
경주마 목장
경주마 목장
 

육십령을 넘어서면 장수경주마목장과 한국마사고등학교가 눈에 들어온다. 여기는 무료로 입장하여 승마 체험도 할 수 있고, 38억원의 몸값을 자랑하는 경주마도 볼 수 있으며, 전국 140여 경주마 생산 농가를 대상으로 무료 교배지원 사업을 하고 있어, 매년 2월 중순에서 6월까지 시행되는 교배시즌에는 전 과정을 일반 관람객에게도 1일 3회 10시, 14시, 18시에 공개한다. 지나는 길이니 잠시 들려 넓은 초원을 둘러보며 여유롭게 풀을 뜯는 말떼를 보며 잠시 휴식을 즐기는 것도 좋다.

이제 논개생가지로 향한다. 이 지역의 역사서들은 논개를 장수군 태생임을 강조하고, 1846년에는 나라에서 논개의 출생지를 기념하기 위하여 장수현에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논개의 출생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언급하여 장계면 대곡리 주촌이 생가지로 유력해 보인다. 하지만 1986년 대곡저수지를 만들면서 생가지가 수몰되어 저수지 근처에 생가만 복원해두었다가 현재의 위치 장계면 의암로 558에 논개 생가지를 복원하여 논개기념관 단아정 의랑루 등의 건물과 주논개비 최경회비 주논개부모묘 등으로 꾸며져 님의 추모성역으로 삼고 있다.
 
논개생가
논개생가
논개상
논개상


논개의 가문에 대한 자료는 구전되어 오던 것이 최근 공개되었는데, 논개의 성은 朱氏이며 본관은 신안으로 아버지는 마을 훈장이었던 주달문이고 어머니는 함양박씨로 義巖(의암)論介(논개)는 1574년(선조 7년) 9월 3일에 태어났는데, 甲戌年 甲戌月 甲戌日 甲戌詩의 특이한 사주를 타고났다하여 이름을 술은 개 戌이라서 ‘낳은 개’라 하여 ‘논개’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논개는 천품이 영리하고 자태가 아름다웠다고 전해지는데 열네 살 때인 1587년에 아버지가 죽자 천하 건달인 숙부가 토호인 김풍헌에게 논개를 민며느리로 팔고 행방을 감추었다. 이 사실을 안 논개 모녀가 외가가 있는 안의의 봉정마을로 피신하였는데, 김풍헌이 당시 장수현감인 최경회에게 이를 알려 심문을 받게 하였다. 논개 모녀로부터 전말을 들은 최경회는 이들을 무죄로 인정하고, 관아에 머물며 병약한 최씨 부인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 논개의 재색에 감탄한 현감 부인이 최경회에게 논개를 소실로 맞이할 것을 권유하여 논개가 18세 되던 해인 1591년 봄에 최경회와 부부의 인연을 맺고 무장현감으로 부임하는 최경회를 따라 장수를 떠나 진주성싸움에 참가하게 되어 최후를 맞았다.

논개는 우리나라 역사상 정조가 굳은 대표적인 여성으로 꼽는다. 원래 양반가 출신이었으나 아버지의 죽음으로 집안이 몰락 위기에 처하자 최경회의 후처로 들어가게 되어 의로운 주검을 맞게 된 님의 길은 다시금 눈시울을 젖게 한다. 장수군민들도 이러한 논개를 사랑하고 장수 3절의 1명으로 여기며 1955년에 논개사당을 건립하여 높은 뜻을 기리고 있다. 이제 님의 이야기의 마무리하기 위하여 토옥동계곡으로 향한다. 토옥동계곡은 덕유산에서 뻗어내린 산등성이의 최남단 골짜기에 숨어있는 계곡으로 자연을 그대로 담고 있다. 여기에 토옥동산장이라는 상호로 커다란 송어양식을 하고 있는 집이 있으니 물이 맑은 청정지역에서 자란 송어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여기서 자란 송어는 씹을수록 단백하고 고소한 맛이 뛰어나며 푸르른 숲이 마음까지 편안하게 해주어 송어회의 달콤한 맛과 담백한 맛을 동시에 느낄 수 있고, 회를 뜨고 남은 머리와 뼈에 무시래기 고사리 등을 넣고 끓인 매운탕 또한 그 진한 맛이 일품이다. 송어는 맛이 좋을 뿐만 아니라 노화방지 피부미용 고혈압 당뇨 등의 성인병 및 암 예방효과도 있어 송어회를 먹으며 건강을 챙기고 충의를 다지는 시간이라 좋았다. /삼천포중앙고등학교 교사


 
논개 영정
논개 영정
선짓국
선짓국 상차림
논개맛길
논개 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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