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외교전
박근혜 대통령의 외교전
  • 경남일보
  • 승인 2013.07.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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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선 (객원논설위원, 사천문화원장)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25분 하얼빈 역 플랫폼, 러시아군이 도열한 가운데 방금 도착한 열차에서 두 사나이가 내리자 군악대 연주가 울려 퍼졌다. 의장대를 사열하고 열병을 끝낸 두 사나이는 나카무라 만철총재, 가와 가미 일본 총영사, 다나카 만철이사, 모리 비서관, 무로다 귀족원 의원 등과 차례로 악수를 하였다. 그리고 늘어선 일본인 거류민들에게 접근하는 순간 쥐색양복 차림에 사냥 모자를 쓴 22~23세가량의 사나이가 불쑥 나서면서 사나이를 향해 권총을 쏘았다. 그와 동시에 러시아 관헌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총 쏜 사람을 덮쳤다. 이때 ‘코리아 우라(대한제국 만세)!, 코리아 우라, 코리아 우라’라는 목소리가 하얼빈 역에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총탄을 맞은 사람은 방금 열차에서 내린 ‘일본제국’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였다. 나란히 의장대를 사열하던 러시아 재무상 코코후초프가 쓰러지는 이토를 부축해 급히 차량으로 옮겼다. 달려 온 수행의사는 맥을 짚더니 ‘거의 즉사’라고 말했다. 이토는 곁에 있던 나카무라 만철총재에게 ‘당했네. 세발을 맞은 것 같네’라면서 ‘누구인가? 모리도 당했는가?’라고 묻고는 곧 숨을 거두었다. 총탄은 가와 가미, 다나카, 모리에게도 부상을 입혔다. 이토를 저격한 사나이는 철도 헌병대 분실로 연행되었다. 현장에 떨어진 권총 탄창에는 총탄 한발이 남아 있었고, 소형 나이프 한 자루도 있었다.(‘광야의 열사:안중근’ 사키류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일본은 끊임없이 한국을 괴롭혔다. 1904년에는 ‘한·일 양국의 항구적인 친교와 동양평화의 확립’을 명분으로 ‘한일의정서’가 한성에서 조인되었다. 8월에는 ‘제1차 한·일 조약’이 조인되었다. 1905년 11월에는 한국을 ‘보호국’으로 하는 ‘제2차 한일조약’이 한성에서 체결됐고, 일본 정부 외무성은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이 해 12월 20일 일본은 서울에 한국통감부를 설치했다. 1907년 7월에는‘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 황제를 퇴위시키고 ‘제3차 한일조약’을 강요해 한국의 내정 전반을 장악했다. 8월 1일 즉위한 순종황제는 통감부의 뜻에 따라 한국군대를 해산했다. 1909년 7월 6일 일본의 카츠라다로 내각은 은밀히 ‘한국합방’을 결정하고 천황은 그날로 이를 재가하였다. ‘한국 황제는 한국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안전하면서도 영원히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도한다’는 ‘한일합병조약’이 다음해(1910) 8월 22일 조인되었다. 이 모든 과정을 일선에서 진두지휘한 인물이 이토 히로부미였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해 9월 체결된 러·일 강화조약(포츠머스 조약)에 의해 러시아로부터 동청철도(東淸鐵道)가운데 대련~장춘구간의 운영권을 넘겨 받았다. 초대 한국통감 자리를 3년 반 만에 그만두고 일본으로 돌아가 추밀원 의장이 된 이토는 이 철도 시찰 도중 하얼빈 역에서 러시아 재무상 코코후초프의 영접을 받았던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저격은 의사 안중근(安重根)의 쾌거였다. 안중근은 진술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로 하여금 많은 한국인이 목숨을 잃은 것에 대해 복수한 것’이라고 말했다.

극적인 비교이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인에게는 공적(公賊)이었으나 일본으로서는 근대화를 이끈 대 정치인이었다. 영웅은 운명을 같이하는가.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1979년 10월 26일 한국의 국운을 변모시킨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한·중 정상회담에서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역 의거 터와 시안 창안구의 광복군 2지대 주둔지에 각각 표지석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중국 측에 요청하고, ‘정전 60주년을 맞아 경기도 파주에 안장돼 있는 6·25전쟁 참전 중국인 병사들 유해 367구를 중국으로 돌려보내겠다’고 말했다. 광복군 제2 주둔지는 1942년 4월 이범석을 대장으로 하여 한국 내에서의 지하군 조직 및 파괴공작, 태평양 방면 파견사령부 설치와 작전계획 등을 세웠던 곳이다.

박 대통령의 요청은 일본의 대륙진출 야망으로 피해를 입은 한국과 중국을 하나로 묶는 심리적 효과를 고양시켜준다. 6·25참전 중국인 병사들의 유해송환 제안은 이른바 항미원조(抗美援朝)의 혈맹 북한에 지대한 자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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