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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축구 마지노선엔 그가 있었다<경남축구열전> '헤딩의 명수' 오뚝이 정용환
박성민  |  smworld17@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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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7.1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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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황선필기자

 
 
“수비는 희생하는 포지션이에요 그것에 참 감사해요”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감독 새 선장으로 홍명보 전 올림픽 대표팀 감독이 선임됐다. 홍명보 신임 감독은 2002년 4강 신화를 이끈 대표적인 한국의 수비수로 손꼽힌다. 스트라이커와 미드필더에선 해외진출 선수가 나오고 있고 어린 유망주들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지만 수비수, 특히 센터백 부분에선 대표팀을 비롯 유소년 축구까지 허약한 실정이다. 홍 감독도 이를 인지하고 수비수 발굴 프로젝트를 천명하고 옥석 가리기에 나섰다. 홍명보 감독이 이름을 알리기 이전 한국 대표팀 부동의 수비수는 정용환이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헤딩력과 상대 공격수의 방향을 예측하는 질식수비로 11년간 국가대표와 주장을 거치며 이름을 떨쳤다. 그의 얘기를 듣기 위해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 좌우명 ‘고진감래’가 시작된 시기

어릴 때 부터 체격이 남달랐다. 남다른 체격에 달리기까지 빨랐다. 운동회에 나서면 언제나 반 대표로 나서 가장 맨 앞서 달리기 일쑤였고 넓이뛰기, 높이뛰기에도 재능을 내비쳤다. “초등학교 6학년때 육상부에 들어갔어요. 대표로 뽑혀 진주공설운동장이나 마산운동장에서 맨발로 육상경기 나갔죠. 경남에서 전체 6위도 해보고 흥미로왔죠” 운동에 소질을 나타낸 정용환은 장안중학교 1학년, 본격적인 축구부활동을 시작한다. 축구에 재미를 느낀 그는 선생님의 권유로 부산진중학교로 옮겼고 거제고를 거쳐 축구명문 동래고까지 이르게 된다. 이때 평생의 은사 김호 전 감독과 만남이 이뤄진다. “감독님이 그러시는 거에요. 너희를 이제 성인으로 인정하겠다”고. 저는 그 말을 모든 걸 책임지고 스스로 할 줄 알아야한다고 받아들였어요. 그게 성인다운 거라고…” 스승의 한 마디가 가슴에 박힌 그는 개인훈련에 매진했다. 계단 잔발 뛰기, 점핑운동, 턴 운동 등 고되고 힘든 개인훈련을 미친 듯이 몰입했다. “평상시에도 의식적으로 나무도 뛰어서 닿아보고 헤딩도 해보고, 누가 보면 미친놈 소리를 들었을 꺼에요. 또 수비를 하려면 시야가 참 중요하더라고요. 깨어있을 때 사물을 보더라고 축구로 연관시켜서 시야에 대한 연습을 하고, 시장에 가서도 ‘옆에 노란차, 빨간차 지나가는 구나’ 이런식으로 항상 연습하고 그랬죠” 좌우명인 고진감래에 따라 연습에 올인했던 노력에 하늘이 감복했을까. 고려대 진학까지 이어지며 축구인생의 탄탄대로가 열리게 된다. 김정남 감독체제의 고려대에서 1학년때 부터 시합에 나가며 11년 국가대표의 초석을 다졌다.

◇ 에이스 킬러, “내가 뚫리면 골이다”

고려대 재학 당시 어려운 시국은 그가 고연전에서 활약한 기회를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청소년 대표로 선발된 그는 일본에서 열린 청소년월드컵에 출전했고 마침내 대학교 4학년때 꿈에 그리던 국가대표 ‘태극마크’를 달게된다. 국가대표가 된 그 앞에 86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허정무, 최순호, 박창선 등 쟁쟁한 선배들 사이에서 최종 수비라인을 책임지며 32년 만의 월드컵 본선진출의 주춧돌이 된다. 특히 일본의 최종예선 1차전 원정경기에서 상대의 허를 찌를 강력한 선취골을 기록하며 한국 월드컵 도전사에 한 획을 긋기도 했다. “멕시코월드컵에 32년만에 나갔는데 지금 생각해보며 1무 2패는 경기 내용면이나 지금의 16강 이상일 정도로 잘한 것 같아요. 하지만 아무래도 정보에 어두웠고 특히 마라도나 같은 경우는 공격템포가 우리들보다 확실히 달랐어요. 순발력과 유연성이 세계 최고수준이었죠. 많이 배운 것 같아요” 86년을 뒤로한 그는 90년 주장 완장을 차고 이탈리아 월드컵에 참가한다. “자신 있었죠. 한 번 경험이 있었고 멤버도 좋았으니까. 그런데 주장이고 고참이다 보니 평가전 등 여러 경기에서 무리를 했어요. 아킬레스가 그때부터 끊어질 정도로 악화된 거죠” 테이핑과 진통제를 맞고 나선 첫 경기에서 벨기에에 0-2로 패했다. 경기 내내 한 발로 싸운 정용환도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차범근 해설위원은 당시 칼럼을 통해 “경기 내내 정용환 뿐이 안보였다”고 전했다. “아쉽죠. 너무 자신감에 차 있었던 것도 있었고 현지적응에 실패한 것도 원인이 된 것 같아요” 그렇게 그의 마지막 월드컵은 그렇게 아쉬움으로 막을 내린다. “저는 상대편 에이스 스트라이커를 막아야 되기 때문에 항상 내가 놓치면 골이다라는 생각으로 경기에 나섰어요. 그래서 더욱 무리한 파울을 할 수 없죠. 정정당당하게 상대를 잡으려면 기술로 제압해야 해요. 그래서 예측수비를 하게 되고 남들보다 몇 배 노력해야 하죠. 그래서 수비수로서 상상할 수 없는 평생 7장의 옐로카드 밖에 나오지 않은 것 같아요”

◇ 유소년은 한국축구의 근간

K리그 대우로얄즈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정용환은 34세, 은퇴를 결정하고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지도자 유학을 떠난다. 그곳에 영어공부와 함께 다시 축구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며 현역에 다시 도전한다. “선수생활을 계속하고 싶었던 마음이 있어서 2,3부 리그도 좋다고 생각했죠. 마침 런던 연고인 풀럼에 입단테스트를 했고 OK싸인 까지 났어요. 그런데 워크퍼밋 문제가 있었던 거에요. 결국 성사되진 못했죠” 현역 도전에 실패했지만 선진축구를 경험한 정용환은 유소년 축구의 중요성을 깨닫고 한국으로 돌아와 창원에 둥지를 튼다. “평생 축구를 하면서 많이 받았으니 봉사하는 마음으로 돌려드리고 싶었어요. 부산지역은 그때 유소년 축구교실이 활성화가 됐었는데 경남은 부족한 거에요. 그래서 창원으로 눈을 돌였죠” 창원에서 유소년 축구교실을 연 그는 창원초등학교 축구부 창단 감독을 비롯 김해 지역에서도 축구교실을 열어 지역유소년 축구 활성화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대한축구협회 전임 지도자로 자리를 옮긴 그는 현재 부산외국어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다. 그는 마지막 말을 통해 “현재 유소년 축구를 주말리그로 운영하는데 바꿔야 해요 . 유소년은 이기는 게 중요하게 아니라 기본기를 알려줘야 하거든요. 경기방식을 방학 때 일정 기간에 모여서 리그를 벌이는 것을 고려하고,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축구협회가 개발하고 고심하는 게 필요하죠. 그게 축구협회가 존재하고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력과 성실을 가장 중요한 덕목을 언급했던 최고의 수비수. 대기만성의 노력형 선수는 아직도 한국축구를 향한 끝없는 사랑을 가슴에 간직하고 있었다.


정용환은
출생= 1960년 2월 10일 기장군 칠암리
학교= 장안중-동래고-고려대학교
선수경력= 청소년 국가대표(1979), 국가대표(1983-1993),대우로얄즈(1984-1994)
수상경력= 대학연맹전 MVP(1983), 서울아시안게임 금메달(1986), K리그MVP, 모범선수상(1991)

정용환 멕시코 월드컵
1986년 멕시코월드컵 베스트 11에 속한 정용환(왼쪽 윗줄 두번째)이 차범근, 허정무, 최순호 등 동료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다이너스컵 우승 정용환
1990년 북경 다이너스티컵에 출전한 한국대표팀이 우승을 차지한 사진. 주장 정용환이 우승컵을 들고 환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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