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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56)<17>지리산문학관과 시조시인 장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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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20  17: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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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56)
<17>지리산문학관과 시조시인 장순하 
 
지리산 문학관 소장 도서는 5만여권으로 집계된다. 작년도에 사봉(史峰) 장순하(張諄河) 시조시인이 기증한 2만권을 포함한 수치다. 그 사이 경상대학교 도서관으로부터 1000권, 한분순 시조시인으로부터 1800권을 각각 기증받기도 했다. 지리산문학관이 경상대학교 도서관으로부터 도서를 기증받은 것은 의외의 일로 보인다. 도서관은 기증받는 기관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국립대 도서관이 민간 도서관에 도서를 기증하는 일은 디지털시대의 장서 개념의 질적 변화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전제되지 않고는 설명이 되기 어렵다. 이 부분은 앞으로 이해될 수 있는 기회가 오지 않을까 한다.

지리산문학관에 장서를 기증한 장순하 시조시인은 1928년 전북 정읍시 소성면 중광리 광조동 185번지 홍성장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소성공립심상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못갈 가정사정으로 집에서 일어판 세계문학전집, 일본문학전집 등을 읽었다. 1943년 늦가을 동갑인 재종 아우와 함께 무작정 상경하여 일제 말기의 온갖 어려움을 몸으로 겪었다. 1944년 봄 총독부 체신국 관하 체신이원 양성소 보험과에 입소했는데 이 기관은 해방후 체신고등학교로 발전했다. 겨울에 양성소를 수료하고 공주우편국 사무원으로 부임했고 우편국 근무중 일본 항복방송을 들었다. 1948년 문교부 위촉 한글학회 부설 세종중등국어교사 양성소에 입소, 여기서 가람 이병기를 만나 시조를 쓰기 시작했고 국어교수법 강사로 출강한 유열 교수에게 발탁되어 현대사라는 출판사에서 6·25까지 근무했다. 유열은 후일 남북이산가족 상봉때 서울에 와서 많은 화제를 뿌린 그 김일성대학의 ‘류열 교수’이다. 1949년 12월 대한교련 발행 ‘새교육’지 12월호에 첫시조 ‘어머님전 상살이’를 발표했고, 1950년 6월 24일 6·25 하루 전 중둥학교 국어과 정교사와 초등학교 정교사 자격증을 받았다.

1950년 6월 27일 북한군이 밀려오던 때 남성중학교(이리) 교사 초빙을 받고 새벽 기차로 이리에 가 윤제술(후에 국회 부의장) 교장에게 사양의 뜻을 밝혔으나 기차가 통할 때까지 단 며칠만이라도 결강을 메워달라 하여 교실에 들어가 보니 최상급반이 구제 6학년(지금 고3)이었고 전란으로 빈 자리가 많았다. 단 며칠간 보강하러 갔다가 그대로 주저앉아 16년간의 교직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1951년 9월 교육법 개정으로 중고가 분리되면서 남성고교 교사가 되었다. 남성에서 ‘남성학보’를 창간하고 전시연합대학의 문리대학장이 된 이병기와 함께 최초의 시조 동인지 ‘新調’를 내고 편집을 맡았다. 1952년 3월 서정주 시인의 후임으로 전주고등학교로 전임, 하희주, 이철균, 김해강, 신석정, 백양촌, 정경태 등 쟁쟁한 시인들과 한 솥밥을 먹었다.1954년 신학기엔 이리 남성고등학교로 회귀하여 시인 조두현, 평론가 천이두, 소설가 홍석영, 시인 이동주 등을 남성교사로 초빙했다. 이런 이름들을 보는 독자들은 전북의 6·25당시의 시인 작가의 판도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1956년 3월 장순하는 1년반의 교제 끝에 민복순과 결혼했는데 신부는 만학으로 숙명여대 국문학과를 졸업하는 이튿날 사모관대에 원삼 족두리 차림으로 결혼에 골인했다. 신랑은 군산여상 교사로 내정되어 있는 신부를 설득하여 고서점 아카데미서원을 개업하도록 했다. 고서점과 아카데미서원이 대조적인데 이것은 장순하 시조의 방향을 바라보게 하는 단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957년 10월 3일 개천절 경축 제1회 전국 백일장 시조부 예선에서 장원하자 ‘현대문학’에서 작품 청탁이 와 ‘울타리’, ‘허수아비’를 발표했다. 이어 ‘현대문학’지에 평론 ‘시조문학 임상 고발’, ‘현대문학 건설의 거점’ 등을 발표해 시조평론가로서의 면모를 동시에 가꾸기 시작했다. 1965년 12월 겨울 방학 중에 국어 전문 출판사인 ‘일지사’에 가서 고등학교 국어 자습서를 집필했다. 1966년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시조작가협회 부회장이 되자 2월에 교직을 벗어나 일지사의 편집 고문이 되었다. 솔가하여 서울 종로구 청운동으로 이사하면서 본격 서울살이가 비롯되었다. 이후의 경력사항은 더 나열하지 않겠다. 이 정도면 그가 한국문단에 본격적으로 진입하여 점차 중심 인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단을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시조집 ‘백색부’ 등 7권, 경시조집 ‘백두산 가는 길’ 등5권, 시조선집 2권, 번역서 2권, 장순하문학전집, 중고 학습참고서 7권, 기타 서적 4권 등 방대한 저서를 남기고 있다.

다음 회에서는 첫시집 출간 무렵의 동정과 그의 주장인 ‘사설시조론’과‘ 경시조’론을 살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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