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런 고얀 놈이 있나…”
“저런 고얀 놈이 있나…”
  • 경남일보
  • 승인 2013.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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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위 (전 고려대학교 초빙교수)
“저런 고얀 놈이 있나…” 이 말은 대한민국 초대대통령인 이승만 박사가 미국의 34대 대통령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이하 아이크)를 향해 내뱉은 말이다. 이 박사와 아이크와는 두 번에 걸친 악연이 있었다. 첫 번째의 악연은 아이크가 대통령 당선자의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였고 두 번째 악연은 이 박사가 아이크의 초청으로 미국을 국빈 방문 하였을 때였다.

첫 번째는 6·25전쟁이 한창인 1952년 12월 2일, 아이크는 대통령 당선자의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에 온 아이크는 자신의 아들을 만나고 전선만을 시찰할 뿐 한국의 대통령은 만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이 박사는 아이크에게 간단한 메모를 보냈다. “미국의 대통령 당선자 아이크가 한국에 왔다 가면서 한국 대통령에게 고별인사도 없이 무례하게 떠났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공표하겠다”라고. 김포공항으로 막 나가려든 찰나에 받아든 이 박사의 메시지에 놀란 아이크는 경무대로 차를 돌려 이 대통령을 예방했다.

두 번째는 휴전 이후인 1954년 7월 26일 아이크가 이 박사를 국빈 초대했을 때 일이다. 한·미정상회담이 열리는 날 아침 10시. 이 박사는 그 시간이 되어도 백악관 회의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백악관 회의실에는 이미 아이크를 비롯한 덜레스 국무장관과 윌슨 국방장관 및 주한 미국 대사 등이 앉아 이 박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 측의 독촉전화가 수도 없이 걸려오는데도 이 박사는 자신의 숙소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이 박사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퉁명스럽게 한마디 한다. “이 사람들이 나를 불러 놓고 올가미를 씌울려고 작정을 한 모양인데 그래도 내가 꼭 가야돼?” 그 전날 미국 측에서 보내온 공동성명 초안 중에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권장하는 문구가 철저한 반일주의자인 이 박사의 마음을 건드렸던 것이다.

이 박사 일행은 약속시간보다 10분도 더 지나서야 백악관 회의실에 들어섰다. 화가 나 있는 사람은 이 박사만이 아니었다. 아이크도 마찬가지였다. 방으로 들어서는 이 박사를 쳐다보지도 않고 낙서하던 자세로 말문을 열었다. “이 대통령! 어제 한국에서 중립국 감시 위원단을 내 쫓았다면서요?” 이 박사 역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들은 스파이에요. 헬리콥터 타고 공중촬영만 하고 다녔어요.”

이어 아이크는 한·일 국교 정상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 박사는 구보다(久保田) 망언을 예로 들면서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고 응수했다. 화가 잔득 난 아이크는 미국이 전략상 필요하다는 데도 한국이 그럴 수가 있느냐는 투로 말하고 숨을 헐떡거리면서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 나가버렸다. 이때 이 박사는 방을 나서는 아이크의 뒷꼭지를 향해 “저런 고얀 놈이 있나…저런!”하면서 극도의 흥분과 분노로 얼굴에 경련을 일으켰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아이크가 다시 방으로 들어오자 이제는 이 박사가 몇 분 후에 “약속이 있어 먼저 갑니다“하고 나와 버렸다.

2007년 10월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평양에 가서 북한의 김정일과 만나 대화 한 내용이 얼마 전 공표됐다. 이 대화록을 보면서 생각난 장면이 이 박사와 아이크가 만나는 장면이었다. 이 박사에게 있어 아이크는 누구인가? 분명히 이 둘의 관계는 갑과 을의 관계다. 미국은 엊그제까지 자신들의 고귀한 피를 흘리면서 우리를 도와준 우방이다. 전후 복구를 위해서는 또 얼마나 많은 원조를 구걸해야 하는지 알 수도 없는 시점에 만나는 갑 나라의 대통령이다.

이 박사는 그런 관계에 개의치 않고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의 품격과 국민의 자존심을 지키는 데에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외교적으로는 절대로 써서는 안 되는 말까지도 서슴없이 쓰면서 상대의 의표를 찔러댔다. 그런데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북한의 김정일을 만나 대화 한 내용을 보면 낯 뜨거운 장면이 한둘이 아니다.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흩날렸다.

그가 한 말 중에서 몇 마디만 인용해 보자 “나는 주적(主敵)용어도 없앴다. 나는 국제무대에서 북한의 변호인 노릇을 했다. NLL(북방한계선)은 시끄러운 괴물이다. 임기 마친 다음에도 평양에 자주 들락날락할 수 있게 해달라.” 이 박사가 지하에서 이 대화록을 보면 어땠을까! “저런 고얀 놈이 있나…” 하는 말을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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