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산행 끝에 마주한 정상 '탄성이 절로'
거친 산행 끝에 마주한 정상 '탄성이 절로'
  • 최창민
  • 승인 2013.07.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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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일보 선정 100대명산 <61>함양 월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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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째 암봉에서 바라보는 월봉산 산줄기.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앙칼진 암봉이 이어지는 꿈의 산책로이다.
구불구불한 바윗길에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초원의 길. 메모리 되지 않았던 심연의 알 수 없는 일들이 얼켜 불현듯 되살아나 감상적이 된다.

 
 
뽐내는 것 같지만 거만하지 않고 화려한 것 같으면서도 촌스럽지 않으며 조용하면서도 찾는 이를 반겨주는, 그래서 은근히 매혹적인 산. 월봉산이 그런 산이다.

최고의 자랑거리는 칼날봉에서 월봉산 정상까지 이어지는 길,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꿈의 등산로이다.

큰 암봉이 있는가 하면 곧장 작은 암릉 길이 나오고 싱그러운 나무터널이 이어지며 드넓은 초원길도 펼쳐진다. 때로는 수수하게 때로는 앙칼지게 올망 졸망 꼬부랑 꼬부랑 진양기맥의 마루금을 이어간다.

이 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사람도 자연의 일부가 된다. 더 이상 짙어질 수 없는 싱그러운 진녹색의 기운이 코끝에 닿은 뒤 심부까지 젖어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옷을 입고 차가운 물속에 들어갔을 때 기분처럼.

남령재에서 시작한 첫 오름길에선 코끝 발끝 손끝을 자극하고, 칼날봉 부근에 닿을 때쯤에는 폐부를 적신다. 칼날봉을 우회해 돌아 선 뒤 시작되는 산책 같은 걷기작업은 마음까지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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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처럼 생긴 칼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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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암봉에서 뒤돌아보는 풍경. 가깝게 2번째 암봉이 보이고 이어진 암릉 뒤로 칼날봉, 더 멀리 남덕유산이다.
 
 
자연 그대로의 색으로 동화돼 마침내 머리가 맑아지고 가슴까지 취하게 되는 신비로움. 정상에 다다를 때는 형언할 수 없는 가슴 벅찬 희열이 밀려온다.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일체감의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월봉산은 덕유산의 명성에 가려 자신의 존재가치를 널리 알리지 못했다. 큰산 밑이 어두운 격이라고 백두대간의 걸출한 산줄기에서 기맥으로 빠져 나간 이유 때문이다. 백두대간은 덕유산→지리산으로 흘러가고 진양기맥은 덕유산→월봉산으로 흘러 좌측에 금원, 기백산, 우측에 거망, 황석산으로 ‘역 Y자’로 가지를 친다. 이들의 모산이 덕유산이라면 이모뻘이 월봉산이다.

▲월봉산(1279m)은 덕유산국립공원 남쪽에 있는 산으로 거창 북상면과 함양 서상면에 걸쳐 있다. 함양 용추계곡을 중심으로 1000m되는 산군이 부채살처럼 퍼져 있는데 좌측에 황석산(1190m)거망산(1184m), 오른쪽에 기백산(1331m) 금원산(1352m)이 위치하고 있다. 한 줄기로 연결돼 있어 4개산을 하루 만에 동시에 주파하는 열렬 광팬이 있고 대개 2개의 산을 묶어 산행하는 예가 많다.

▲취재팀의 산행코스는 남령재→칼날봉→1099봉→더미암봉→월봉산→헬기장→큰목재→노상계곡→노상저수지→노상마을회관.

휴식시간 포함 5시간 50분이 소요(10km)됐다. 원점회귀가 불가해 택시를 이용, 남령재로 되돌아가야한다. 노상마을에서 서상 개인택시를 부르면 5분 만에 달려온다. 교통비는 남령재까지 1만5000원.

▲들머리 함양에서 거창으로 넘어가는 남령재 주변에 주차할 공간이 있다.

100여m를 걸어가면 대형 등산로 입간판이 오른쪽에 있고 들어서면 작은 물줄기 건너서 길이 열려 있다. 남령재는 고도 884m. 그러니 정상까지는 약 400m의 고도 차가 난다.

취재팀은 오전 9시 정각에 출발했다. 볼 것 없이 처음부터 된비알이다. 숨 막히는 된비알을 20여분정도 올랐을까. 전망대에 서서 한숨을 돌리고 뒤돌아보면 멀리 삐죽삐죽 할미봉이 요상하고 기이하다. 산줄기를 따라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남덕유산 준령이 안개 속에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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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봉산 실루엣과 푸른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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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봉산


30여분 만에 첫 능선에 올라선다. 정면에는 나뭇잎 사이로 서울의 63빌딩처럼 길고 높은 첫번째 암봉 칼날봉(수리봉)이 하늘을 찌를 듯 곧추 서 있다. 칼처럼 날카롭게 생겼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 전형적인 화강암봉으로 북한산 인수봉이나 설악산 공룡능선 일부를 떼어 옮긴 것처럼 생겼다. 어느정도는 올라갈 수 있지만 경사가 급하고 위험해 되돌아 내려와야 한다. 암봉에 접근한 뒤 곧바로 왼쪽 하부로 내려서 우회해 통과할 수 있다.

출발 1시간 20분 만에 두번째 바위지대에 닿는다. 1099봉으로 보이는데 여러개의 바위로 구성돼 전망이 좋다. 멀리 안개 속에 가야할 월봉산이 보인다.

이 길은 자작나무나 삼나무 메타세콰이어 군락처럼 단일목의 정제된 길이 아니라서 더욱 좋다. 부드러운 육산에 군데 군데 앙칼진 바위가 사막에 지쳐 죽어 남긴 낙타의 뼈처럼 불쑥 불쑥 솟아 올라 있다. 구불구불한 바윗길에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초원의 길. 메모리 되지 않았던 심연의 알 수 없는 일들이 얼켜 불현듯 되살아나 감상적(感傷)이 된다.

10여분간 사진촬영 겸 휴식을 취한 뒤 자연의 길에 몸을 맡긴다. 로프에 의지해야 할 만큼 경사 큰 바위 길. 미끄럽고 위험해 안전사고에 더욱 신경써야한다.

세번째 암봉. 여기서는 뒤돌아보는 풍경이 그림이다. 지나온 두번째 암봉과 이어진 암릉과 칼날봉, 더 멀리 배경으로 깔린 덕유산의 너른 품. 바다인지 하늘인지 온통 푸른빛 계열이다.

돌 틈에 뿌리내린 잔디꽃이 발끝을 스치고, 바위틈 고목도 생명의 시간을 힘겹게 건너간다. 나무가 바위를 움켜진 것인지 바위가 나무를 구속한 것인지, 거칠고 척박한 땅에 터잡은 소중하고 질긴 생명들이다.

출발 1시간 40분 만에 월봉산 정상에 닿는다. 정상석 주변에 나무가 둘러 싸여 있어 가장자리로 나서야 사방을 볼 수 있다.

출발할 때부터 불어제친 산들바람이 주변의 안개를 몰아가고 푸른 하늘까지 보여주면서 상쾌함은 배가된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월봉산을 떠나 처음으로 나오는 봉우리는 헬기장. 아득히 먼 지리산과 황석산이 구름을 허리에 감고 있다. 구름 그 너머 바다 위에 뜬 섬이 천왕봉과 중봉이다. 화강암 황석산성이 보이는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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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와 야생화


월봉산정상에서 점심시간으로 지체된 까닭에 출발 2시간 50분 만에 큰목재에 닿는다. 재에는 초지와 싸리나무 등 키 작은 식물들이 군락을 이룬다. 더 진행해 봉우리를 넘어 수망령으로 갈수도 있고 은신치로도 갈 수 있다.

취재팀은 오른쪽 노상마을 하산 길을 택했다. 습지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면서 실개천이 형성된다. 하산 길은 실개천과 웅덩이함께 하기도 하고 벗어나기도 한다. 여유로운 하산길이다. 급하지 않고 편안한 계곡의 청정 숲길. ‘첨벙’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둔탁한 등산화를 벗어던진다.

조선의 선비나 은둔자, 초야에 묻힌 사람들은 흐르는 계곡에 발을 담그고 더위를 쫓았다. 선비여서 혹은 체면때문에 벌거벗은 몸을 드러내지 않고 발만 물에 담그는 약식 피서법이다. ‘탁족’(濯足)이라고 한다. 흐르는 물에 발을 씻으면 몸의 기가 흐르는 길을 자극해 건강에 좋다고 한다. 자연 속에서 더위를 잊게 하는 그럴싸한 피서다. 함양 농월정 앞 계곡의 탁족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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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마을 두할머니
 


중국 전국시대의 비극의 시인 굴원은 어부사에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발을 씻는다.’는 글을 남겼다. 탁족이 여기서 왔다. 세족(洗足)은 흐르지 않는 물에 발을 담그는 것을 말한다.
오래 전 이름 없는 월봉산 노상계곡에 선비가 올 일이 없었을 테고 이 산골에서 땅을 파먹던 약초꾼이나 나무꾼들이 잠시의 휴식으로 탁족을 즐겼을 것이다.

이 길에서 그런 사람을 만났다. 그는 손에 박스를 들고 있었는데 그 안에 노트 2권이 눈에 띄었다

“어디에 쓰실 겁니까” “아, 어느 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온다고 해서 그분들에게 그림을 그려 선물로 주려 구요” “그림을 잘 그리시나요” “에이, 그림 정규교육도 받지 않았어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 뿐이라서요”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전국의 산을 떠돌다가 3년 전에 이 산 중턱에 정착했다고 했다. ‘몸이 좋아졌다’며 웃는 모습이 순수하게 보였다. 그는 “나무와 돌을 이용해 이제야 고단한 몸을 누일 수 있는 방을 한칸 마련했다”며 뿌듯해 했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다 버리고 욕심 없이 소박하게 살아야 할 사연이 무엇이었을까. 일면, 산 사람의 기운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건강과 쾌유의 인사를 나누고 돌아섰다.

노상저수지 옆 서너개의 모롱이 길을 따른 뒤 둑을 내려서면 계곡과 논 사이 시멘트길이 하산을 안내한다. 땅심을 받은 벼는 작렬하는 초복의 태양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날머리 노상마을 언덕에 위치한 작은 집 앞마당에 할머니 두 분이 마주 앉아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우는 풍경이 정겹다. 5시간 40여분이 소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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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틈새 핀 이름없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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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봉산 등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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