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길 교수의 경제이야기
김흥길 교수의 경제이야기
  • 경남일보
  • 승인 2013.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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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계의 여왕 가브리엘 샤넬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샤넬(CHANEL)’은 그 창업자인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Chanel)이 세상을 떠난 지 4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영향력은 막대하다. 1893년 프랑스 남서부 지방 소뮈르에서 행상을 하는 아버지와 병약한 어머니 사이에 2남 3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게 되자 자녀들을 부양하기가 막막해진 아버지는 샤넬을 언니와 함께 고아를 엄격하게 교육시키는 수도원 직속의 고아원에 맡겼다. 고아원에서 직업 교육으로 바느질과 재봉기술을 배우게 되었는데 후일에 패션업계로 입문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독립심이 강했던 샤넬은 여러 직업을 전전하는 가운데 카페에서 가수로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코코리코’라는 노래를 즐겨 불러서 얻게 된 별칭이 ‘코코(Coco)’였다. 후에 샤넬을 상징하는 향수 이름을 ‘코코’로 명명하였고 알파벳 C를 겹쳐서 만든 샤넬 로고로 탄생하게 된다.

고아원에서 나온 샤넬은 중부지방 물랭의 어느 여성 의류용품점 직원으로 취직하게 된다. 당시 물랭에는 프랑스 육군 기병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거리를 활보하는 귀족 출신의 사관들을 쉽게 볼 수 있었는데, 샤넬은 유복한 가정 출신의 기병대원과 교제하면서 상류층 사람들과 교제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들과 교제하면서 그런 사람들의 패션 감각을 익히고 거기에다가 자신의 생각과 창의력을 가미해 독창적인 패션과 스타일을 창조해나가게 된다. 예컨대 당시 귀부인들의 모자는 장식이 많다보니 크고 무거웠다. 그래서 샤넬은 디자인이 단순하면서 가벼운 모자를 직접 만들어 쓰고 다녔는데 멋있다는 평판이 나면서 여기저기서 만들어달라는 부탁이 쉴 새 없이 들어왔다. 그러던 중 샤넬은 스물일곱 나이에 젊은 영국 사업가 카펠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고, 그의 재정적 후원으로 파리에서 ‘샤넬 패션’이라는 가게를 열게 된다. 이렇게 처음 연 가게에서 그녀가 만든 모자가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모자 판매로 사업이 안정적 기반을 갖추게 되자 영불 해협에 위치한 휴양도시 도빌에 두 번째 가게를 열게 된다. 이곳에서는 해변에 어울리는 스커트와 상의를 손수 디자인하고 만들어서 판매하게 되는 데 이 휴양도시를 찾는 귀부인들 사이에 평판이 자자해지면서 디자이너로서 탄탄한 명성과 자리를 잡게 된다.

그런데 1914년에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자 전쟁터로 나간 남편을 대신하여 경제활동에 나선 부인들이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전통적인 복장보다 활동하기에 좋은 옷을 찾게 되었다. 샤넬은 이를 기회로 포착하여 실용성과 우아한 멋을 함께 갖춘 샤넬 재킷과 스커트를 내놓음으로써 선풍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직선으로 떨어지는 옷을 선보이고 치마를 과감하게 잘랐다. 바로 그 유명한 샤넬 라인을 창조한 것이다. 당시의 여성들에게 자유와 해방감을 맛보게 해주는 획기적인 디자인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여성의 허리를 잘록하게 조여서 풍만한 여성의 몸매를 강조하는 S자형 실루엣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샤넬은 자신처럼 날씬한 체형에 어울리는 멋진 옷들을 만들어 새로운 패션을 창조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샤넬 패션의 유행으로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조건까지도 바꾸어놓게 되었다. 즉 1920년대까지만 해도 미녀의 조건이던 풍만한 몸매가 차츰 바뀌어 아름다운 여성의 조건으로 ‘날씬한 몸매’를 내세우게 된 것이다.

1921년에는 ‘여성의 패션은 향기로 완성된다’고 생각한 샤넬은 향수 산업에 관심을 가지고 예쁘고 세련된 유리병에 담아 그 유명한 ‘샤넬 No. 5’를 내놓게 된다. 샤넬은 이 No. 5를 통해서 패션업의 경영다각화를 꾀하게 된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샤넬은 화장품, 액세서리 등도 만들어 시장에 진출하면서 ‘샤넬’이라는 브랜드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였고 사업은 번창하였다. 그러나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샤넬은 디자이너 일을 그만두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스파이 누명 때문에 스위스에서 15년 간 은둔 생활을 하다가 1954년에 71세의 나이로 새로운 컬렉션의 발표와 함께 패션계로 복귀를 선언하였으나 유럽의 미디어로부터는 ‘대실패’라는 혹평을 받고 만다. 그러나 실용성을 강조하는 미국에서 호의적인 반응을 얻게 되어 샤넬의 옷들이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디자이너로 다시 패션계로 돌아온 샤넬은 1971년 1월 어느 날 87세의 나이로 조용히 숨을 거둔다.

샤넬은 사교계의 중심에서 스스로 만든 옷을 입고 자신의 브랜드를 홍보했다. 샤넬은 남이 만든 유행을 따르지 않았고 자신이 유행을 창조했던 것이다. 샤넬은 ‘패션은 유한하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던 그녀의 화려하고도 우아한 인생은 패션계의 영원한 전설로 남아있다. /경상대학교 경영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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