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宗·端宗大王 胎室地 민묘 “스스로 옮기는 것이 도리다”
世宗·端宗大王 胎室地 민묘 “스스로 옮기는 것이 도리다”
  • 경남일보
  • 승인 2013.08.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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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기 (논설고문)
조선 제4대 임금인 세종대왕(世宗大王) 태실지(胎室地)는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소곡산 산 27번지에, 제6대 임금인 단종대왕(端宗大王) 태실지는 은사리 소곡산 438번지에 있다. 519년간의 조선왕조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세종대왕·단종대왕 태실지는 풍수적으로 길지(吉地)였음이 역사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일제는 조선 왕실의 태실지가 길지에 있다는 것을 알고 1929년 조선왕조의 정기를 끊기 위해 전국에 흩어져 있던 조선왕실의 태실들을 강제로 경기도 양주 서삼릉으로 옮기고, 태실이 있던 국가소유 땅을 민간인들에게 불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특히 세종대왕 태실은 일본에 의한 수난이 심했다. 즉위 원년에 이봉된 태실은 174년이 지난 임진왜란 때인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해 1차 파손되는 첫 수모를 겪는 등 일본에 의해 2번이나 파손됐다. 단종대왕의 태실은 규모가 적었기 때문에 임진왜란 때는 훼손은 안됐지만 일제 때 지맥을 끊는다고 산자락마저 끊어버렸다.

조선왕조 정기 끊으려 서삼릉으로 이전

조선왕조의 태실지는 길지라고 알려지자 조선을 강제점령한 일제가 순사의 입회아래 고의로 모조리 파괴, 그 자리마저 또다시 복원되지 못하도록 민간에 팔아 버렸다. 조선 왕실은 국운과 관련이 있다고 하여 태(胎)를 더욱 소중하게 다루었다. 태어난 왕자, 공주 등의 자식들의 태를 묻기 위해 특별히 태실도감을 설치, 태를 봉안할 명당을 물색한 다음 안태사(安胎使)를 보내 태를 묻게 했다. 우리의 태실 중시는 태도 몸의 일부로 간주, 삼국시대부터다. 우리나 최초의 태실기록은 충북 진천군 진천읍에 있는 신라 때 김유신의 태실이다.

동서로 300m 거리를 두고 세종과 단종의 태실이 있던 자리에 민간인의 묘가 들어서 있다. 세종대왕 태실지는 위치도 본자리인 산봉우리에 있어야 하지만 민간인의 묘가 자리하고 있어 태실지를 복원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다만 주변에 흩어진 비석과 조형물들을 통해 이곳이 세종과 단종의 태실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단종대왕 태실지는 비운의 왕이었지만 왕의 태실지인데 민묘 앞에 서 있는 호화스런 석물에 비하면 초라하게 방치된 모습은 단종이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에서까지 대왕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어 안쓰럽기 그지없다. 단종대왕 태봉에는 태실은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파손되고 깨어진 중동석을 비롯해 귀부와 이수, 태비신(胎碑身) 등 석물들만 민묘 주변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을 뿐이다. 심하게 깨어져 마모된 태비신에 ‘대왕(大王)’이라고 새겨진 글자가 이곳이 단종대왕의 태실지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오늘날은 태실에 대해 거의가 관심이 없다. 더구나 일제가 철저하게 파괴한 세종대왕과 단종대왕 태실의 석물이 파괴되고, 분실당하고, 남은 부분만 겨우 모아져 민묘가 있는 태실지였던 아래에 모아져 있거나 나뒹굴고 있어도 현재 별로 관심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일제의 만행이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했는지에 대한 관심도 별로 없다. 왕이 개인의 자격으로 태실을 쌓아 왕가(王家)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였지만 왕만의 태실이 아닌 국가와 백성의 태실도 되는 것이다.

현재 세종대왕의 태실터도 민간인의 무덤이 들어섰으며, 태실비와 태실석물 일부만이 원래 있던 자리에서 100m 쯤 산 아래로 쫓겨나 태봉 중턱에 모아져 보호되고 있을 뿐이다. 민묘에 그 자리를 빼앗긴 세종대왕 태실지는 산세와 지세, 수세 등을 보면 풍수적으로 명당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일제가 태실 이전, 파괴 후 민간에 불하

세종대왕 태실지와 단종대왕 태실지는 지난 1972년 경남도지정 기념물 제30호와 제31호로 각각 지정됐다. 특히 한글을 창제한 성군인 세종대왕과 비운의 왕인 단종대왕의 태실지가 마땅히 국가문화재로 승격돼야 한다. 세종대왕 태실지와 단종대왕 태실지는 만약에 안내판이 없다면 이곳이 태실지였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훼손이 심하다. 국가 차원에서 원형 복원이 시급한 시점이다. 세종대왕·단종대왕의 태실지를 본 국민대다수는 비록 조선이 망하고 왕권이 없어졌지만 태실지에 있는 C·H가문의 후손들은 “민묘를 스스로 옮기는 것이 도리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수기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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