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찬열 (한국폴리텍대학 항공캠퍼스 교수)
몇 년 전에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서적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 정의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단기간 압축성장으로 이뤄낸 자본주의와 산업사회의 성과 속에 오직 유용함이 선이라는 절대 명제에 정의가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정의에 대한 관심은 우리가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으로 긍정적인 움직임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경영학에서 말하는 정의에는 필요, 균등, 형평이 있다. 식당에서 자율배식으로 자기의 식사량에 따라 음식을 먹는 것은 필요의 정의이고, 직장에서 같은 근무복을 입고 일하는 것은 균등의 정의이며, 일의 성과에 따라 임금에 차등을 두는 것은 형평의 정의이다.
과거 흑백 차별정책으로 유명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진출한 칼텍스 정유의 철수를 둘러싸고 정의 논쟁이 벌어진 사례가 있다. 칼텍스의 철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칼텍스가 법인세를 납부함으로써 부도덕한 정부를 지원하는 것이 되므로 정의의 원칙과 인간의 권리에 위배된다는 것이었고, 칼텍스의 철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칼텍스가 흑인 근로자를 고용함으로써 복지와 고용에 기여하는 것이 되므로 관심과 배려의 원칙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토마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어느 기간 정상과학을 차지한 패러다임(지배적 가치관)도 혁명과학의 도전을 받게 되고 논쟁을 거쳐 혁명과학이 다시 정상과학의 패러다임을 차지하게 된다고 밝히고 있다. 예를 들어 중세의 패러다임인 천동설이 근대로 오면서 혁명과학인 지동설로 패러다임이 바뀐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세상의 진리라는 것은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것으로서 불변의 진리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결국 정의도 어느 하나의 절대선이 아니라 대립되는 요소의 균형과 조화이다. 동양의 중용 혹은 중도라는 것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고, 인체나 조직의 건강도 기가 잘 흐르고 항상성(homeostasis)이 유지되는 것이다.
한 쪽으로 보는 세상이 빨리 보고 편하기는 하지만 멀리 넓게 볼 수는 없으므로 두 눈으로 골고루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어울려 사는 사회에서 서로 같지는 않으나 화합을 추구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과 다른 점은 놓아두고 공통점을 추구하는 구존동이(救存同異)가 요구된다.
전찬열 (한국폴리텍대학 항공캠퍼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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